정치팀에 합류한 뒤 5박 6일 출장이 잡혔다. 이렇게 길게 인규랑 떨어져 본 적은 없었다. 인규가 걱정됐지만 섬세하게 마음을 쓰기엔 출장 준비만으로 벅찼다. 인규한테는 일주일 전부터 '엄마가 다섯 밤 동안 없어'라고 알려줬다. 갑자기 오래 비우면 힘들어할 것 같아서 나름 예방주사를 놓은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부터 안 그러던 인규가 자다 깨고, 짜증도 더 많이 내는 거 같았다. 내가 곧 없어질 거란 사실 때문에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우리 엄마는 '웃기지 말라'라고 했다. 애들은 크다 보면 잘 자는 때도 있고 자다 깰 때도 있고. 짜증 내는 시기도 있고 안 그런 시기도 있는 거라고. 인규는 달라진 거 없으니, 출장 준비나 잘하라고. 역시 우리 엄마는 지혜롭다.
성격 탓에(?) 어디 1박을 놀러 가도 오랜 시간에 걸쳐 한 트럭 짐을 싸는데. 내 짐만 쌌더니 정말 금세 준비가 끝났다. 물티슈와 쉬통, 여벌 옷, 비상약, 비상 간식 없는 가방이라니... 짐 챙기는 게 일도 아니었다. 출발 전날, 아직 '5박 6일' 개념이 없을 인규를 위해 달력을 만들었다. 빈칸에 하루식 동그라미를 치고 그 동그라미가 다 차면 엄마가 오는 거였다. 얼마나 있어야 엄마가 오는 건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서 만들어 본 '출장 달력'이었다. 인규가 달력 만드는 게 재밌었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달력을 냉장고에 갖다 붙였다.
'나왔어' 출장 달력. 5박 6일이란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막상 인규 없이 비행기를 탔더니. ...솔직히 너무 좋았다. 비록 일하러 가는 거였지만 '앞자리 발로 차면 안 돼', '자꾸 그러면 저기 삼촌이 이놈하러 온다!', '쉿! 쉿!' 이런 말을 안 해도 되는 게 좋았다. 내가 원할 때 뭘 먹고, 졸릴 때 자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인규 태어나고 3년 반 넘게 꿈도 못 꿨던 일이다.
서울과 시간차가 있다 보니 잠을 거의 못 잤다. 아침 뉴스까지 만들면 현지 시간 밤 11시가 넘어갔고, 뒤풀이도 일인지라 빠지고 않고 참석했고, 다음날 아침용 보고를 만들어놓고 잠을 잤고, 한국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게다가 5박 동안 태국, 미얀마, 라오스 3개국을 들르는 일정이다 보니 거의 매일 밤 짐을 쌌다. 그런데 희한한 게, 몸이 받쳐줬다. 진짜 피곤하긴 했지만 지치거나, 지쳐서 가라앉는 느낌은 없었다. 20대 중후반 타사 후배들이 '선배 체력이 진짜 좋으신가 봐요'라고 했다. 그러게, 왜 이러지? 일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가? 내 체력이 아직 괜찮나?
모든 일을 마치고, 업무 부담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타고 나서야 생각이 좀 정리가 됐다. 출장 6일 동안은 엄마도, 워킹맘도 아니고 오롯이 '나'로 지냈던 거였다. 내가 평일에 아무리 애를 안 본다지만. 내 정체성에 '엄마'가 빠진 적은 없었다. 육아 대부분을 엄마와 이모한테 의지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퇴근하고 나면 내가 아닌 '인규 엄마'가 되는 거였다. 힘들다. 일에만 몰입해도 힘든 직업인데 일도 하고 엄마도 하려니 힘들었다. '엄마' 역할을 안 했더니 6일간 슈퍼파워가 나왔던 거였다. 애기 둘에 정치부 베테랑인 타사 선배한테 말했더니, '나도 첫 순방 때 한 숨도 안 잤잖아. 하나도 안 힘들더라고'라는 답이 돌아왔다. 웃음이 나왔다.
출장 뒤 집에 와보니 동그라미가 다 차 있는데, 인규 아빠 말로는 이미 첫날 밤에 3개를 채웠다고 한다.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인규 말로는 이제 출장을 가도 되긴 한데, 3일 이상은 안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3일까진 괜찮다고.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나름 열심히 살지만 늘 피곤하고 이리저리 치이는 나도 좀 짠하고. 자기 삶은 포기하고 내 빈자리를 채워주는 우리 엄마도 짠하고. 나도, 우리 엄마도, 여기저기 쓰는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면 매일매일 슈퍼파워를 내며 살고 있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