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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Nov 10. 2019

힘을내요 슈퍼파월

이건 어디서 온 힘이란 말인가.

정치팀에 합류한 뒤 5박 6일 출장이 잡혔다. 이렇게 길게 인규랑 떨어져 본 적은 없었다. 인규가 걱정됐지만 섬세하게 마음을 쓰기엔 출장 준비만으로 벅찼다. 인규한테는 일주일 전부터 '엄마가 다섯 밤 동안 없어'라고 알려줬다. 갑자기 오래 비우면 힘들어할 것 같아서 나름 예방주사를 놓은 거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뒤부터 안 그러던 인규가 자다 깨고, 짜증도 더 많이 내는 거 같았다. 내가 곧 없어질 거란 사실 때문에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우리 엄마는 '웃기지 말라'라고 했다. 애들은 크다 보면 잘 자는 때도 있고 자다 깰 때도 있고. 짜증 내는 시기도 있고 안 그런 시기도 있는 거라고. 인규는 달라진 거 없으니, 출장 준비나 잘하라고. 역시 우리 엄마는 지혜롭다.


성격 탓에(?) 어디 1박을 놀러 가도 오랜 시간에 걸쳐 한 트럭 짐을 싸는데. 내 짐만 쌌더니 정말 금세 준비가 끝났다. 물티슈와 쉬통, 여벌 옷, 비상약, 비상 간식 없는 가방이라니... 짐 챙기는 게 일도 아니었다. 출발 전날, 아직 '5박 6일' 개념이 없을 인규를 위해 달력을 만들었다. 빈칸에 하루식 동그라미를 치고 그 동그라미가 다 차면 엄마가 오는 거였다. 얼마나 있어야 엄마가 오는 건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서 만들어 본 '출장 달력'이었다. 인규가 달력 만드는 게 재밌었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달력을 냉장고에 갖다 붙였다.


'나왔어' 출장 달력. 5박 6일이란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막상 인규 없이 비행기를 탔더니. ...솔직히 너무 좋았다. 비록 일하러 가는 거였지만 '앞자리 발로 차면 안 돼',  '자꾸 그러면 저기 삼촌이 이놈하러 온다!', '쉿! 쉿!' 이런 말을 안 해도 되는 게 좋았다. 내가 원할 때 뭘 먹고, 졸릴 때 자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인규 태어나고 3년 반 넘게 꿈도 못 꿨던 일이다.


서울과 시간차가 있다 보니 잠을 거의 못 잤다. 아침 뉴스까지 만들면 현지 시간 밤 11시가 넘어갔고, 뒤풀이도 일인지라 빠지고 않고 참석했고, 다음날 아침용 보고를 만들어놓고 잠을 잤고, 한국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게다가 5박 동안 태국, 미얀마, 라오스 3개국을 들르는 일정이다 보니 거의 매일 밤 짐을 쌌다. 그런데 희한한 게, 몸이 받쳐줬다. 진짜 피곤하긴 했지만 지치거나, 지쳐서 가라앉는 느낌은 없었다. 20대 중후반 타사 후배들이 '선배 체력이 진짜 좋으신가 봐요'라고 했다. 그러게, 왜 이러지? 일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가? 내 체력이 아직 괜찮나?


모든 일을 마치고, 업무 부담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타고 나서야 생각이 좀 정리가 됐다. 출장 6일 동안은 엄마도, 워킹맘도 아니고 오롯이 ''로 지냈던 거였다. 내가 평일에 아무리 애를 안 본다지만. 내 정체성에 '엄마'가 빠진 적은 없었다. 육아 대부분을 엄마와 이모한테 의지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퇴근하고 나면 가 아닌 '인규 엄마'가 되는 거였다. 힘들다. 일에만 몰입해도 힘든 직업인데 일도 하고 엄마도 하려니 힘들었다. '엄마' 역할을 안 했더니 6일간 슈퍼파워가 나왔던 거였다. 애기 둘에 정치부 베테랑인 타사 선배한테 말했더니, '나도 첫 순방 때 한 숨도 안 잤잖아. 하나도 안 힘들더라고'라는 답이 돌아왔다. 웃음이 나왔다.


출장 뒤 집에 와보니 동그라미가 다 차 있는데, 인규 아빠 말로는 이미 첫날 밤에 3개를 채웠다고 한다.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인규 말로는 이제 출장을 가도 되긴 한데, 3일 이상은 안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3일까진 괜찮다고. 귀엽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나름 열심히 살지만 늘 피곤하고 이리저리 치이는 나도 좀 짠하고. 자기 삶은 포기하고 내 빈자리를 채워주는 우리 엄마도 짠하고. 나도, 우리 엄마도, 여기저기 쓰는 에너지를 하나로 모으면 매일매일 슈퍼파워를 내며 살고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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