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핑계 삼아 향수를 샀다. 내 기억에 (어릴 때 장난감 같은 고체향수를 한 번 샀던걸 제외하고는) 내 돈 주고 향수를 산 것 자체가 평생 처음인 것 같다. 냄새에 무척 민감하다 보니, 정작 내 몸에는 향을 못 뿌렸다. 무엇보다 인규를 갖고, 낳고, 키우면서 인규한테 안 좋을까 봐, 심지어 향이 나는 로션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출입처에서 좋아라 하는 타사 여기자가 향수를 즐겨 쓰는 걸 보면서 뭔가를 느꼈다. 멋있었다. 어디선가 킁킁 좋은 향이 나서 주위를 둘러보면 그 기자가 보였다. 향으로 존재를 알릴 수 있다니. 멋있지 않은가! 사실 카리스마 넘치는 그 친구는 굳이 향으로 알리지 않아도 존재감을 뿜어내는 멋진 여성이다. 오랜만에 복귀한 '빡센' 출입처. 나는 뭘 해도 워킹맘인데. 그 친구는 그냥 여기자인 게 멋있어 보였던 거 같다.
이제 '졸업'했다는 '인증'도 필요했다. 나는 만 4년 인규를 키워놓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에 복귀했으니. '향'좀 풍기고 다녀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침 최근 눈여겨보는 브랜드에서 적당한 향도 찾은 터였다. 풀잎 향 같기도 하고. 뿌린 듯 만 듯 독하지도 않고. 남편 표현으로는 '깔끔한 문구점 향'이라고 했다.
(나보고 '문구점 향을 좋아한다'면서 놀린 거였는데. 그 표현이 너무 맘에 들어서, 역시 이 사람과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한참 고단하게 일하던 때. 퇴근하고 돌아오면 나는 특유의 쎄-한 냄새가 있었다. 나는 엄마한테 깊게 배인 그 회색 같은 쎄-한 냄새가, 엄마의 오랜 노동의 흔적인 것만 같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 냄새가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좀처럼 안 없어지고, 그래서 자주 마음에 걸린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 가족이 자신들의 신분을 처음으로 들킨 건, 집주인 아이가 맡은 '지하 냄새'였다. 섬유린스를 바꿔봤자 소용없다는 그 냄새. 지하방을 탈출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을 그 냄새. 계층 차이를 보여줄 상징으로 냄새를 선택하다니. 그 디테일함이 '참 못됐다' 싶었다.
@ 영화 <기생충> 포스터 스틸
몇 년 전 '김남주 오일'이 유행이라길래 엄마를 사드렸는데 '향이 좋다'며 참 좋아하셨다. 지금까지도 즐겨 쓰시는 그 오일을 쓸 때면. 엄마한테 회색 대신 부드럽고 우아한 '브라운' 냄새가 났다. (뭔가, 갈색 말고 브라운.)
엄마가 그 향을 너무 좋아하고, 엄마한테 그 향이 너무 잘 어울려서. 우리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인데, 지금껏 회색을 쏟아붓고 살았구나 싶었다. 그 덕에 나는 이렇게 '향수를 사는 어른'으로 컸다.
한번은 퇴근하고 인규를 껴안았는데 엄마의 그 오일 향이 묻어났다. 우리 엄마는 인규를 얼마나 껴안았길래 향이 옮겨갔을까 싶어서, 살풋 웃음이 나왔다. 인규한테 만큼은. 외할머니가 좋은 향이 나고, 포근하고,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치 회색 향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