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이 으레 그렇듯) 우리 엄마는 가족 단톡방에 이런저런 카드 뉴스나 생활정보를 올리신다. (그리고 아들딸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대체로 제대로 안 읽고 적당한 이모티콘 정도로 답을 한다.
그런데 엄마가 띄운 카드 뉴스 중 기억에 나는 글이 하나 있다.
외국의 한 마트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손주를 데리고 나오셨다. 할아버지가 연신 "톰 괜찮아. 괜찮아. 톰, 괜찮아. 잘하고 있어. 괜찮아."라고 하면서 너무나 차분하게 손주를 잘 보더라는 거다. 그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게 손주를 볼 수 있는 겁니까, 비결이 뭡니까" 물었더니. 할아버니가 "톰은 손주 이름이 아닙니다. 톰은 내 이름입니다."라고 했다더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
육아를 하면서 저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바로 어제도, 분명 책 3권만 읽고 자기로 한 인규가 1권을 더 읽겠다고 울고, 불을 더 환하게 키겠다고 울고, 침대 가드 구멍에 다리를 집어넣으면서 울고.... 그럴 때마다. 이미 혀 끝까지 올라온 "이제 그만하지 못해"를 꾹꾹 삼키며. '그래... 참자... 쟤가 졸린데 엄마랑 더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알잖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소리치는 대신, "인규야. 약속한 건 지켜야지. 일로와, 안아줄게"로 말을 바꿔본다.
스스로 인내심이 강한 편이라 자부한다. 그럼에도 육아의 어떤 순간, 여지없이 무너진다. 아이는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내가 무방비일 때 치고 들어온다. "인규야, 화가 많이 났구나, 일로와 안아줄게"라는 건, 내가 4시간밖에 못 자고 일어나야 하는 상황인데 쟤가 30분째 저러고 있으면 잘 안 나오는 말이다. 종일 일하고 지쳐서 들어왔는데 인규가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면 그냥 '하아' 한숨부터 나온다. '애를 보면 피로가 싹 풀려요'라는 건 공익광고 거나 매일 칼퇴근하는 사람들이나 쓰는 말일 거다. 빨리 준비해서 출발해야 하는데 '유튜브 하나만 더 보고'라고 말하면, 그땐 얼굴부터 싹 굳어진다. 얼굴 근육 하나하나 세심하게 바꿔가며 '너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아?'를 보여주는 식.
'인내심'은 배영옥 육아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는 엄마라서 그런 줄 알았다. 엄마는 다 참는 건 줄 알았다. 내가 엄마가 돼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엄마여서 참은 게 아니라, '우리 엄마'여서, 그게 배영옥이어서 그렇게 잘 참아온 거였다.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의 인내 범주는 더 다양하고, 그 다양한 것들이 각각 정도는 더 심했던 거 같다. 애가 셋이었고, 어느 시점에는 시 증조할머니도 모셨고, 아빠는 매일 술을 드셨으며, 딸밖에 없다고 무시당했고, 경제적으로 늘 쪼들렸다. 돈을 벌러 나가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았다. 그때는 독박육아, 이런 말조차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혼자 버텼다. 그랬을 거다. 나는 기껏 잠이 부족해 인규한테 버럭, 화를 냈지만. 우리 엄마는 나에 이어 내 자식한테조차 인내의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인규 낳고 얼마 안 됐을 때 언제인가 엄마한테, 애보기 너무 힘들다면서, '엄마... 언제까지 인내해야 해?'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나는 지금도 인내하고 있다"란 말로 막내딸의 입을 닫아버리셨다. (바로 그날 오전에도 나는 엄마한테 진상을 부렸더랬다.) 엄마가 '톰 할아버지' 이야기를 공유했던 걸 돌이켜보면. 엄마는 지금도 인내하는 법을 수련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참 멋진 일이다.
인규는 할머니 덕에 멋진 사람으로 크고 있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