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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Apr 21. 2020

이제, 아파트를 떠납니다.

아파트 7층. 우리 가족 첫 집에 남기는 고별사

2014년 2월에 들어와 꽉 채운 6년을 살았다. 전세 계약을 두 차례 연장했고 마지막 한 차례를 더, 1년을 연장했지만, 두 달 만에 다른 집으로 가게 됐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집주인 생각이 먼저 난다. 좋은 분이셨다. 과하게 전셋값을 올리지 않으셨고. 2년에 한 차례, 재계약 때 남편을 만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첫째 아드님이 의대에 진학하면서 우리에게 집을 내주게 되셨는데 그 아들은 이제 의사가 됐다. 착해서, 착실하게 잘 따라와 줘서 의사로 키울 수 있었지만 특목고를 다니는 동안 적잖이 고생했다고 하셨다. 나름 서울 역세권에 브랜드 아파트지만 두 동짜리 아파트여서인지, 우리가 사는 동안 집값은 많이 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집주인이 조금 안타까웠고, 집주인은 투자에 신중하라고 하셨다. 좋은 분이셨다. 


첫 눈사람. 첫 비누방울 놀이. 인규의 모든 처음이 이 아파트에 남아 있다.


가깝게 지내진 못했지만, 좋은 이웃들도 많았다. 만삭인 내가 안방 화장실을 타고 들어오는 담배 냄새 때문에 고생하자 남편은 위아래 층을 돌아다니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래층 604호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은 아니에요' 하셨는데. 그렇게 얼굴을 튼 이후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주셨다. 나는 아직도 한번씩 올라오는 화장실 담배 냄새를 맡으면 '아래층인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고 '아저씨일까 아줌마일까' 궁금하지만. 인규가 태어난 뒤, 나 역시 그분들에게 '층간 소음'이라는 고통을 안겨드리는 입장이 됐다. 인규가 안방으로 거실로 '다다닥' 뛰어다니기 시작한 지 3년이 넘었다. 코로나19로 '칩거' 중인 최근 두 달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인터폰 한 번, 방문 한 번 안 하신 의인들이다. 인규에게 매일 밤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아래층 아저씨가 올라오신다!'라고 말하지만 인규는 콧방귀 한 번 안 뀐다. 


위 층, 804호와의 인연도 있다. 어린아이를 재우는 법을 모르겠는데 저 아이가 자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었던 시절. 아이를 겨우 재우고 살얼음 낀 강가를 건너오듯 살금살금 기어 빠져나오는데, 위 층에서 남자아이들이 울고 소리 지르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말리는 할머니의 '샤우팅'이 위층이 아니라 바로 내 귀에 대고 소리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나는 방금 숨 쉬는 것도 멈추고 깨금발로 기어 나왔는데. 그들은 마음껏 달리고, 싸우고, 던지고, 소리치고 있었다. 어느 날은 대화 내용 속속들이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하게 들렸다. 804호 가족 목소리가 큰 건지 아파트 시공에 문제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나름 참고 지내던 어느 날, 남편과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804호 할아버지를 만났고, 나는 조심스럽지만 강하게 '너무 시끄럽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우리 부부를 보고 '고생 많았다'고, '우리 곧 이사 나간다'고 알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들이 넷인데. 애들 엄마가 없어요. 엄마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우니까 애들이 말을 잘 안 들어."


...순간. 내가 왜 시끄럽다고 했을까, 그냥 조금만 더 참을걸. 이미 오래 참아왔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당황한 채로 7층까지 금세 도착해버려서 '애들이 참 잘 큰 거 같아요'란 그럴싸한 말 한마디 조차 못 꺼냈다. 804호에는 곧 아이가 하나밖에 없는 '조용한 가족'이 새로 들어왔다. 다만 젊어 보이는 아빠가 자주 화를 냈고 물건을 부쉈다. 아파트 시공에 문제가 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예전에 살던 804호. 4명의 아이들이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 집은 인규가 태어나 평생을 산 집이다. 집 부엌과 거실을 나누는 큰 기둥이 하나 있는데. 우리 엄마는 그 기둥 때문에 집이 좁아 보이고 부엌도 쓸모가 없다며 자주 기둥을 탓하셨지만. 인규랑 잡기 놀이를 할 때 빙글빙글 돌기에도, 숨바꼭질을 할 때 한편에 숨기에도 좋은 기둥이었다. 남향인 베란다에서 방울토마토를 키웠는데 천장까지 자라기도 했다. 인규는 방울토마토를 '똑' 따서 맛있게 먹었다.

 

두 돌도 안 됐을 때부터 지난해 5월까지. 인규 키를 한쪽 벽에 기록해놨다. 어릴 때 아빠가 나에게 해주던 대로.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집. 7층 아파트를 떠나며 근사한 고별사를 남겨주고 싶었는데. 막상 안쪽 방 한쪽 벽에 기록해둔 인규의 '성장 기록'을 보니. 아. 내 집을 사야 하나- 생각이 든다. 집에는 시간이 쌓인다. 막상 이사를 가려니 지난 6년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나는 느낌이다. 그것도-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키운 귀한 6년의 시간. 안녕. 덕분에 고맙고,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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