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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May 23. 2020

단독주택 입주 3주차

어두워지면 자고 밝으면 일어나는 삶

아침 8시 반. 곤히 자는 인규를 두고 먼저 출근했다. 이사 온 지 3주, 이제야 인규는 제 양껏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안 깨우면 아침 10시가 넘도록 안 일어나는 아이인데, 인규는 이사 온 다음 날 6시 반에 일어나 우리를 깨웠다. 아침이 됐으니 놀아야 한다는 거다. 새 집이 아니라 어디 펜션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6시 반에 강제 기상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는 시간이 늦춰졌다. 인규도 나도 남편도. 조금씩 조금씩 새 집에 적응하는 중이다.


아파트에서는 두툼한 암막 커튼을 사용했다. 남편은 하루 걸러, 나는 가끔 24시간 밤샘을 하는 일이다 보니 암막 커튼이 필수였다. 암막 커튼이 없는 집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막상 주택에 왔더니 커튼을 설치할 수가 없었다. ㄱ자로 꺾여 가로로 긴 안방 창에도, 벽 두 곳에 창이 각각 나 있는 인규 방에도 커튼은 어울리지 않았다. 집에는 이미 블라인드가 설치돼 있었다. 커튼 없이 괜찮을까 싶었는데. 며칠 해보니 적응이 됐고, 나름 장점이 있었다. 일단 이 동네는 밤이 충분히 어두웠다. 이전에 살던 집은 바로 맞은편 영어학원이 밤새 간판을 끄지 않았다. 새 집은 두툼한 커튼으로 밤을 시작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해가 지고 나면 깜깜해졌다. 남편과 나는 각자 일을 줄이면서 야근도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적당히 빛이 들어와 있는  나쁘지 않았다. 어둡게 해서 자고 일어나서 밝게 하는 삶에서, 어두워지면 자고 밝으면 일어나는 삶으로 바뀌었다.


창문 열고 뒹굴거리는 재미가 생겼다.


인규는 단독주택으로 이사 오고 나서 TV 보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다. 내가 마당에서 화분 흙을 갈고 있으면 인규는 마당에 따라 나와 알아서 놀거리를 만들어냈다. 하루는 떨어진 솔가지를 주워다가 그걸로 나무들 물을 주겠다며 물을 묻혀 돌아다녔고, 또 하루는 작은 보물들을 찾겠다며 돌멩이나 솔방울을 주워 모았다. 그냥 이 바가지에서 저 바가지로 물을 옮기며 한참 놀기도 했다. 인규는 수박과 망고를 먹고 한켠에 씨를 심었다. (정확히는... 씨를 심고 싶다며 수박과 망고를 사달라고 했다.) 한 일주일 넘게 열심히 물을 주면서 '왜 싹이 안 나지?' 하길래, 솔직히 말해야 하나- 좀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것 같다. 해바라기를 심어 씨앗을 먹고 싶다길래 모종 두 그루를 사다 심었다. 햇볕이 충분히 들지 않아 잘 자랄지 걱정이지만. 인규는 마냥 좋아했다. 그럼 됐다.


한밤중 마당에 수박 씨 심기. 이것저것 참 잘 찾아 논다.

나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긴 우리 남편은 부쩍 부지런해졌다. 단독주택에 살면 부지런해야 한다-거나, 단독주택은 일이 많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뭔가 끊임없이 움직이게 된다. 하다못해 자기 전 거실과 계단 블라인드를 내리고, 아침에는 올리는 것만 해도, 일이라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면서 창 밖에 나무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마당에 나가서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으는 게 주택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라면 일이지만. 퇴근해서 마당 한번 둘러보고 나뭇가지 줍고. 그러는 기분이 좋다. 누군가 단독으로 이사 갈지 고민한다면 '일이 많다'는 걸 함부로 무기로 삼지는 않아야겠단 생각이다. (음... 단독으로 이사 가는 데 신중하라고 할 때 내밀 무기는. 그것 말고도 여럿이 있다!)


결혼할 때 80만 원 주고 산 이케아 소파나(그땐 이케아가 없어서 무려 해외배송을 했다), 임시로 TV를 올려둔 고가구는 바꾸고 싶었지만 남편과 의논 끝에 일단 계속 쓰기로 했다. 넓어진 부엌 공간에 맞춰 우드 슬랩 식탁만 새로 장만했다. 파주 끄트머리 제조 공장까지 가서 괜찮은 가격에 느티나무 제품을 찾아냈다. 이사가 결정된 순간부터 열심히 '오늘의 집' 어플을 들여다보며 인테리어 고민을 했지만, 크게 뭔가를 바꾸거나 꾸미지 않았다. 나는 금손도 아니고 남다른 감각도 없다. 집주인이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목단꽃으로 '조경'을 해놓았는데 나는 그 앞에 작은 플랜트 박스를 놓고 상추와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지난 주말 비가 내리고 나니 상추가 제법 빳빳하게 자리를 잡았다. 세련되고 이쁘게 살 자신은 없지만 재밌고 행복하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단독주택에 산 지, 이제 3주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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