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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Nov 09. 2020

지금, 산후조리원에 있습니다.

산후조리원에서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보다. (배경 사진 출처 tvN)

나는 자주 내 삶을 전생과 현생으로 나눈다. 2015년 11월 첫 출산, 그 이전과 이후의 삶. '전생' 때 나는 젊고 가벼웠고 뭔가를 계속 성취하려고 치열하게 움직였다. 누군가를 돌봐도 되지 않는 삶. 내가 내 앞가리만 하면 되는 삶. 부단히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그런데도, 전생을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 만나면 우리는 이렇게 한탄한다. '왜 더 놀지 않았을까. 왜 석박사 따지 않았을까. 왜 더 많은 나라를 다녀오지 않았을까. 왜 세계 평화를 이뤄내지 못했을까'  (다시 돌아간다면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산후조리원 내 방에 앉아 요즘 '핫'하다는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봤다. 애를 낳다 저승사자를 만난 주인공이 배를 가로채(?) 저승을 빠져나오자 '산후 세계'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피식,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출산 과정에서 '아, 인간도 결국 짐승이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온갖 고생을 다 겪고 안락해(보이는) 산후조리원에 처음 입소한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 못 돌아가...)

tvN 드라마 <산후조리원> 공식 포스터

5년 전 첫 출산 때 나는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2주 간 산모를 돌보는 '시장 시스템'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그렇게 큰돈을 써야 한다는 게 마뜩지 않았다. 다같이 모여 가슴을 열고(!) 모유수유를 한다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고, 조리원 동기라는 모임이 형성된다는 것도 싫었다. 집에서 사설 산후도우미를 불러 한 달 정도 지냈는데, 그 결과. 나는... 바닥까지 나가떨어졌다. '산후 세계' 입구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그 '모유수유'에 나는 무지했고, 처절하게 패배했다. (심지어 그때는 지금처럼 친절히 알려주는 모유수유 전문가 유튜버들도 없었다!)


트라우마에 가까운 경험에 둘째가 생기자마자 산후조리원부터 예약했다. 모유수유란 세계에 또다시 들어섰을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고, 그 도움을 통해 (5년 사이 더 나이 든) 내 몸도 좀 보살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산후조리원에 있다. 둘째 엄마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산후조리원. 대략 일정은 이렇다.

<3시간마다 수유 / 아침, 오전 간식, 점심, 오후 간식, 저녁, 야식 주는 거 챙겨 먹기 / 최소 3차례 좌욕 / 새벽 수유를 위한 낮잠 / 산후 마사지 / 가슴 마사지 / 각종 강의 / 운동>

참고로... 약 3시간마다 하게 되는 수유는 1번 하는데 짧게는 40분 길게는 한 시간 넘게도 걸린다. 음식은 계속 나와서 첫날에 한 끼니씩 밀렸었는데 안 먹었더니 배가 고파서 열심히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수유 여파). 좌욕은 상처가 난 회음부 회복에 가장 효과적인데 좌욕하다가 수유하라는 전화(수유 콜)가 오면 대략 난감하다. 산후조리원의 꽃이라는 산후 마사지만큼은 절대 사수해야 한다. 가슴 마사지는 살아남으려면 중간중간받아야 한다. 나는 아직 조리원 운동 시설 근처에도 못 가봤다...!  

약 3시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수유 시간이 산후조리원의 현실.


대체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저걸 다 하고 있는 건지. 나만 빼고 다들 우아하게 운동하다가 다같이 모여 애프터눈 티 세트라도 먹는 건 아닌지. 나는 경산모인데 왜 이렇게 허덕이는 건지... 대체 누가 산후조리원을 천국이라고 한 것인가 싶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가슴에(울혈 증상) 첫 하루 밤을 꼬박 지새우고 어떻게 어떻게 둘째 밤까지 보내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제 때 나오는 맛있는 식사, 가만히 있으면 따박따박 갖다 주는 밥과 간식. 문 앞에 슬쩍 내놓으면 다음 날 깨끗이 접혀서 돌아오는 빨래. 수유만 해서 보내면 기저귀 교체도 목욕도 다 해주는 신생아실. 한 번씩 돌아오는 꿀맛 같은 마사지... 아. 그렇구나. 집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게 다 꿈만 같겠지. 산후조리원이 천국인 건 <내가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를 나가면 지금보다 더 힘든 현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구나. 그래서 나는 지금 천국에 있는 거구나.


'요즘' 여성들에게 엄마가 된다는 건 경이롭다기보다 사실 다소 잔인하다. '격정 출산 느와르'라는 드라마 <산후조리원>은 당연히 과장됐고 상징적이었지만 한 장면 한 장면 현실을 너무 고스란히 담고 있어 보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됐다. 왜 그동안 '임신-출산-산후조리원'은 한 번도 무언가의 '소재'가 되지 않았을까. 특정 나이, 특정 성별에서만 겪는 '그(녀)들'만의 이야기는 주류 '히스토리' 범주에도 못 들어갔던 거 아닌가 싶다. 저 안에 담긴 수많은 여성들의 피, 땀, 눈물, 회한, 새로운 삶은 맘카페에서 하소연으로 쌓였을 뿐 지금까지 제대로 소화되지 않았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 다소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되는 저 여자들의 고군분투가 동지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됐으면 좋겠다.


+ 단 하나, 내가 겪은 것과 많이 달랐고 내 기록을 꼭 남겨놓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 드라마에서 출산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남성 전문의가 줄줄이 내진을 하고 밉상으로 진료하는 부분이 연출됐는데 '남성' 전문의였음을 임산부 굴욕의 소재로 삼은 건 좀 아쉬웠다. 게다가 산부인과에 여성쌤들이 얼마나 많은데!


분만 직전이 되면 분만실에는 잘 짜인 프로들이 완벽한 팀을 이뤄 '착착' 최종 분만 과정을 준비한다. 며칠 전 겪은 내 두 번째 출산. 이른바 '무통빨'이 끝나가 진통이 다시 시작되고 출산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내 눈 아래 펼쳐진 광경에 잠시나마 '아 너무 멋있다'란 생각이 들었다. (맞다, 그 와중에도 말이다.) 주치의 선생님, PA 간호사 일 것으로 보이는 전문 간호사 선생님, 분만을 도와줄 간호사 선생님들, 아기를 받을 간호사 선생님들 등 순식간에 모여든 대략 여섯일곱 정도의 의료진이 모두 여성이었다. 사진 한 장 남기고 싶다 생각했지만- 십여분 만에 나는 새 생명을 맞았다. 두 번째 '산후 세계'에 들어서느라 사진은 못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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