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말에서 6월 첫째 주

너와 너의 딸이 나와 내 아들을 만나 새 유행어를 만들었다.

by SAN

_우린 중2 때 처음 만났다. J, Rin, 나, 소식이 끊겨버린 유진까지. 올해로 28년째,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들이다. 어릴 때 친구들이 의례 그렇듯 우린 함께 '처음' 해보는 일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단골 떡볶이 집을 만들었고, 처음으로 친구네 집에 모여 밤새 놀아봤고, 처음으로... 술을 마셔봤다...(!). 아, 그래, 그날. 나는 옛날 일들을 대체로 까맣게 잊어버리는데 그날은 어째 소소한 장면까지 제법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 중 누가 봐도 전교 1등 할 것 같은 모습의 유진이와(실제 유진이는 1등 하는 친구였다) 그냥 조그마해서 누가 봐도 철없는 어린애처럼 보이는 내가 덜덜 떨며 동네 슈퍼에 가서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삼촌 심부름'이라고 굳이 말해가며 맥주 '' 병을 사갔다. (장난은 좀 심했지만) 우린 대체로 모범생에 가깝고 착한 애들이었는데 그날은 그저 '나쁜 짓' 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뭐가 나쁜 짓인지도 잘 모르는 여자 애들 넷이서. 그래서 기껏 맥주 '한 병'을 산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케이블 TV까지 켰다. 뭔가 우리가 보면 안 되는 영상을 열심히 찾았는데, 제목이 '바디 플레이'였다. 아니... 아니...?

우린 그냥, 중2였다.

_Rin이, 이제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나이에 거의 가까워진 딸을 데리고 뉴저지에 왔다. 나는 일상을 살고, Rin은 이곳저곳 투어를 다니다가 오후에 모여 아이들은 마당에서 깔깔 거리며 놀고 우리는 열심히 밥을 지어먹었다. 김치찌개나 한 번 끓여줄까 봐-라고 했던 Rin은 김치찌개를 원샷하는 우리 집 1호를 보고. 그다음 날 찜닭을, 또 그다음 날은 돼지불백에 들기름 막국수를 만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니'를 반복하며. 정말 열심히 밥을 해 먹었다. 한국이었으면 '뭐 먹을까' 하며 배민을 켰겠지만 미국에는 만족스러운 한식도 없고, 그걸 그래도 용납 가능한 가격에 배달시켜 먹을 방법도 없다. 자연스럽게 마당에서 파 잘라오고, 깻잎과 상추를 따와 고기를 구워 먹었다. 거하게 밥을 차려먹고. 때로는 옥수수도 삶아 먹고. 그리고 또 사과, 복숭아, 살구, 수박도 먹었다. 심지어 H마트에서 사이다를 사다 각종 과일을 잘라 넣어 화채까지 만들어 먹었다. (마지막으로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우리가 커서, 이렇게 어른이 돼서, 이제 우리 아이들을 키우며- 밥을 해 먹고 있다. 음식을 해서 우리 아이들을 먹이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누구 하나 놀리느라 한 명이 노래 부르면 다른 한 명이 자연스레 비트박스를 넣고 있지만... 그런 우리가, 진짜 어른이 됐나 보다.


나는 아직도 중요한 메모에 CCM이라고 표시한다. '컴 컴 문제'의 앞글자. 중학교 때 시험공부를 하다 예상 문제가 나오면 우리는 '컴 컴 문제'라며 CCM이라고 표시해 뒀다. 손동작인지, 멜로디인지도 있었다. (Rin이나 J는 알 텐데.) 28년 지기 그녀들은 그렇게도 내 삶에 늘상 함께 한다. 이번 여행에서 Rin과 나는 새 유행어를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그녀의 딸과 내 아들도 함께했다. 만날 때마다 써먹어야지. J한테도 알려줘야겠다.

옆집 H네 마당 야외극장. 참 좋은 시간들이다.


_어느 날 팔뚝에 낯익은 상처를 발견했다. 며칠 전에 어딘가에 데었던 자국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처, 내가 아는 거다. 우리 엄마 팔에서 자주 발견했던 자국. '엄마, 좀, 조심 좀 하지, 왜 또 데고 그래' 이런 말도 했던 거 같고. '아니, 요리 경력이 몇 년이신데 베테랑 주부님 왜 아직도 데고 그래요' 비슷한 말도 했던 거 같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다. 아니 내가 이렇게 어리석다. 끝내, 겪어야만 아는 것들이 있다. 제시간에, 그러니까 애들이 아주 심하게 배고파지기 전 잘 먹을 시간에. 1호는 이거, 2호는 저거 각각 원하는 거 잘 먹는 거 각각. 후다닥 후다닥 저녁 준비를 하다 보면 언제고 팬에 냄비에 오븐에 데고, 칼에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베이고 만다. 유난 떨 여유도 없이 대충 처치하고 다시 저녁을 준비하고 그 저녁을 치우고 부엌을 정리하고 애들을 씻기고 재우는 시간. 심지어 엄마가 그런 상처들에 왜 그리 무심했는지도 이제는 알 것 같다. 나 자신이 소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어리석어서도 아니고. 소처럼 무뎌서도 아니고. 그냥 매일의 반복 중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나한테는 그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더 많으니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우리 엄마를 닮아간다.




_일주일 두 번은 목공 시간. 내 소중한 한국 이웃 H네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해 준 평대패가 불을 지폈다. 나무 겉면이 쓱쓱 베어져 나갈 때마다 어머, 이거 너무 좋은데 싶었다. 지금 다니는 공방에서는 수공구를 기본으로 여러 파워툴도 모두 배운다. 어릴 때 고모할아버지가 목공소를 하셨는데, 그때 자주 들었던 기계음이 줄톱으로 나무 가공할 때 나는 소리였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아직도 톱질이 어려운 초보지만, 나무 만지는 일이 무척 즐겁다.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손에 공구를 익혀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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