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어떤 위로보다 쌍욕이!
둘째 Pre-K 하원을 나간 지 넉 달째. 어쩔(?) 수 없이 학부모들과 자꾸 안면을 트게 됐다. 브로큰 잉글리시의 강자. 첫 스몰톡은 가능하지만 두 번째 핑퐁부터 어김없이 허우적대는 나로서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영어가 늘어가는 둘째는 이제 학교 끝나면 적어도 5분 정도는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은 아이가 됐고. 그렇게 애들 뛰어노는 걸 지켜보다 보면 어느 착한 현지 부모들이 '안녕?' 하고 꼭 말을 걸어온다. 그리고 개중에 정말 착한 애들만 나의 '부러진 영어'를 듣고도 두 번 세 번 더 말을 걸어온다.
우리 집 2호랑 하원 시간이 딱 겹치는 J라는 아이가 있는데 늘 아빠가 픽업을 나온다. 2호와 J는 교실을 나가자마자 마당으로 전력질주하며 뛰어놀기 시작하고, 그러면 나랑 그 아빠는 가방 챙기고 떨어진 물건들 따라가면서 줍고 문 잡아주고... 하는데. 이상하게 이 아빠가 Hi, Hello, How are you 중 어떤 말도 안 하는 것이다. 그 흔한 미국식 미소조차 짓지 않길래 이상하다 싶었지만, 초반에는 나도 그냥 어색하니 가만히 있었다. '이상 신호'를 감지한 건 어느 날,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할 때였다. 다시 건물로 들어가 같이 화장실로 가는데. 여기까지 온 이상 인사를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안녕, 나 2호 엄마야'라고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씹혔다. 심지어 내 눈도 안 마주쳤다. 잠깐, 못 들었나 싶어서 '안녕...'이라고 자신 없이 다시 말을 걸어봤지만, 여전히 아무 답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못 들은 게 아니라 확실한 무시였다는 걸 느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망한 마음에 성격이 소심하신가... 아니면 내 영어를 못 알아들은 건가, 엄마들이랑 말 안 하나- 하고 말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앞마당에서 다른 학부모, 다른 엄마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는 J 아빠를 보면서 불쾌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 겪은 일도 아니다. 동네에서 다른 학부모에게 정말 깔끔한 '쌩 무시'를 당해본 경험이 전에도 있었다. 문제는 이럴 때마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그런가? 인종차별인가?' 등등 나한테 원인을 찾으며 파고들게 된다는 점이다. 나한테는 특히 영어가 걸림돌이었다. 다시 안 볼 사이면 한 번 불쾌하고 말겠는데. J아빠는 하필이면 하원 시간이 겹치고, 하필이면 애들은 늘 같이 놀고 싶어 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위축됐다. 심지어 그가 소나타를 타고 가는 걸 보며... '아니! 한국차 타면서!!! 본인이 한국차 타면서 나 왜 무시해!!!'라고 '속으로' 외친 게 다였다.
볼 때마다 너무 불쾌하다고 하소연했더니. 미국에 오래 사신 한 한인 분은 영어 문제가 아니라고 위로해 줬다. 영어 잘하는 본인도 때때로 텃새를 느끼고, 그것 때문에 너무너무 짜증 난다고. 동네 특성상 부모님부터, 조부모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터줏대감들이 '내 영토'라고 한없이 코를 높여가며 벽을 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다른 분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최근 아시안 인구가 늘어나면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고도 했다. 토종 White Anglo-Saxon 인 할머니 영어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이 참, 아직 갈길이 멀다'라고 한탄하면서 '네가 예뻐서(네??) 말 걸기 어려웠을 거야'라는 전통적인 위로를 건네주셨다. 그러면서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Hello~ Can you hear me???" 한 번 해주라고 하셨는데... '저, 선생님, 그 얘기까지는 제가 하겠는데요, 그 뒤에 답을 했을 때 제가 이어서 한방 더 받아치지를 못할 것 같아요'라고- 영어로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
그런데 내 거의 유일한 '토종' 친구 Matt은, 내 하소연을 듣자마자 쌍욕을 했다. 음... 대략. "그는 ㄱㅅㄲ야, 재수 없는 ㅅㄲ, 나쁜 ㄴ(놈 아님)이네."였다. 예상 못한 반응에 그때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런데 그 욕이, 효과가 엄청났다! 원래 J 아빠를 볼 때마다 불쾌한 마음보다 위축된 마음이 더 컸다. '흥!'이 아니라 '흥....'이랄까. 그런데 Matt의 쌍욕을 들은 뒤로 J 아빠를 볼 때마다 Matt한테 들은 단어 <jerk>부터 떠올랐다. '풉, 너 jerk래. 훗! 넌 jerk야!' 그리고 지난주, 2호 졸업식 행사장에서 저 멀리 있는 J 아빠 보고는 훗~ 하며 그냥 지나쳐갔다. 위축되기는커녕 불쾌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의 착한 다른 학부모들과 친절하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때로는 어떤 다정한 위로보다 쌍욕이 효과가 있다. 정말이다! 나도 적절한 욕을 일발 장전하고 있다 누군가 비슷한 하소연을 하면 곧바로 내뱉어야겠다. 영어, 한글 둘 다 연습해 둬야지.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