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아빠의 장례식.

한국에서의 마지막 기억.

by SAN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9월 첫째 주.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즈음이 떠오른다. 뉴스 스튜디오를 겸한 집을 구하기 위해 미국에 닷새정도 출장을 갔다가, 회사에 복귀한 날이었다. 부장님께 인사드리고,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하려는데 둘째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119 구급차에 실려가셨다는 내용이었다. 노트북도 그대로 두고, 부장님께 죄송하지만 집에서 이런저런 연락이 와서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린 다음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그사이 아빠가 쓰러지신 장소인 노인복지관에 전화를 걸어, 당시 상황을 알아봤다. 상황이 심각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 이때였다. 구급차에 타실 때 의식이 없으셨다는 거다. 운전 중이었지만 틈틈이 언니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모르니 병원으로 오는 게 좋겠다고. 그러는 사이 성모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남편이 먼저 와있었다. 나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침상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계셨다. 응급실 선생님께서 아주 잠시 나를 기다려주신 듯했다. 내가 도착한 뒤에야 사망선고를 하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아빠 손이 따뜻했다는 거. 나는 아빠한테 사랑한다, 애쓰셨다, 미안하다 말했지만, 끝내 고맙다 말하지는 못했다. 잠시 뒤 도착한 둘째 언니는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고, 엄마는... 사흘만 앓다가 가지, 왜 그렇게 갑자기 가냐고. 오랫동안 소리도 못 내고 우셨다.


그 뒤는 너무나도 바빴다. 마침 같은 병원에서 얼마 전 아버지상을 치른 내 중학교 친구 R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R은 장례지도사 번호를 알려줬다. (이렇게 R과 나는, 여중생 시절 처음 같이 각종 일탈을 해본 추억에, 이제 장례지도사까지 공유하게 됐다!) 그 뒤로는 '결정'만 하면 됐다. 장례식장 크기를 뭘로 할 것인지, 국화꽃은 몇 단으로 꾸밀 것인지, 음식은 몇 가지를 할 것인지, 수의는 어떤 종류로 할 것인지, 상복은 몇 명이 입을 것인지 사이즈는 뭘로 할 것인지... 그 모든 선택은 돌아가신 아버지보다는 남아계신 어머니를 위해 결정됐다. 아빠를 보내드리는 엄마의 마음이 서운하지 않도록. 그리고 아주 나중에, 당신의 떠나는 길이 어떨지 혹여 떠올려 보셨을 때- 마음에 부족함이 남지 않도록. 관 종류와 유골함까지 고르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갔던 것 같다.


주변에 연락을 돌리는 게 일이었다. 이 또한 경험 있는 이들 즉 먼저 아버지를 잃어본 회사 K 선배가 도와줬다. 나도 모르게 근조화환 개수를 자꾸 체크하게 됐다. 아빠의 지인들이 둘러보실 것 같아서, 엄마가 나와서 한 번씩 살펴보실 것 같아서. 세상에, 근조화환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니...!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더라. 그냥,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옛날 친구들부터 제주도에서 온 M 가족에 늦은 밤 부고를 보고 찾아온 이웃까지... 많은 분들이 들러주셨고, 큰 위로가 됐다. 나도 앞으로 부고를 잘 챙겨야겠다, 그래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우리는- 엄마와 딸 셋. 사위 셋. 이모와 사촌오빠. 그리고 다른 외가 친척들까지. 우리는 정말이지 우리답게 상을 치렀다. 아빠 얘기를 하며 한바탕 울다가도 '드립의 핏줄'임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경쟁적으로 드립을 쳐가며 웃었다. 조합이 참 좋은 세 사위들은 성격도 스타일도 결정도 천지차이인 세 딸이 이런저런 선택을 두고 옥신각신 할 때마다 적당히 끊어내며 일을 진행시켰다. 납골당을 어디로 할 것인지 장례지도사님께 수고비를 얼마 드릴지 등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는 우리 세 자매를 보며 내 남편은 우리 엄마한테 '아니, 저 딸들을 대체 어떻게 키워내셨어요'라고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남편을 잃은 엄마를 위해, 언니들은 모두 우리 집에서 '합숙'을 했다. 심지어 짐을 모두 미국행 배편에 실어 보낸지라 텅텅 빈 집에서 엄마와 우리 세 딸은 오랜만에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맛있는 걸 먹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답게 서로를 위로하고 아빠를 추모한 다음 오랜만에 다시 출근을 했다. 1월, 출근길이 너무 추워서 '하아-'라고 입김이 절로 나왔고, 그 입김 끝에 '아빠'라는 말이 나와버렸다.


하아- 아빠.


내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그 단어에 이제 주인이 없다는 걸 그제야 새삼 깨달았다. 시끌벅적 상을 치르고 다시 조용한 일상을 맞이하고 나서야 아빠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가족 모두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두셨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미국으로, 둘째 언니는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누구도 예상 못하고 벌어진 일이었다. 아빠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왔다. 아빠의 부재를 느낄 수 없는, 아예 다른 세상으로 와버린 거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간다니 이제야, 새삼.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한테 늘 차갑게 굴었지만. 차갑고 못되게 구느라, 끝내 감사하다 말하지 않았지만. 언니들을 남겨준 것만 해도 감사하단 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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