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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담 Oct 25. 2017

일일 정리 -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그대 모습은 노란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요 근래 내 상태는 처참했다.

인생이 진흙탕 속을 나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에 추억에 삶의 주도권을 뺏겨있는 지금 나는 내 방과 같이 엉망이다.


분명 좋았던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는 모든 행복은 모두 너로부터 오는 것이라 진득하게 여기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내 방에 녹아든 너와 나의 시간들이 모두 가시를 세운 이 밤.

나는 온몸으로 방에 돌아가길 거부하고 있다.

마치 압정이 한가득 들어있는 통을 방안에 쏟은 듯했다.

어디서부터 주워 담아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껏 가장 작은 서랍조차 열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흔적이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엄살이 유독 심한 나 자신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너의 잔상들과 잠들 수 없었다.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 외출복을 입은  죽은 듯 쓰러져 잠자기를 반복했다.

창가에 일렁거리는 밤의 괴물들이 너에게 전화라도 걸게 할까 봐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그러나 나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차분히 메스와 트레이를 준비한다.

가차 없이 잘라 내리라고 오늘 마음먹은 것이다.

하루에 하나씩 만이라도 냉정해 지리라고.


서랍 속

너의 연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네가 훈련소로 들어간 이후 나는 목이 빠지도록 편지를 기다렸다.

지독히도 편지가 오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했던 기억이 난다.

정작 나도 편지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보급용 편지지에 적힌 너의 글자들이 헛헛하다.

29번 훈련병은 유독 지난날들을 후회하고 있다.

내가 자신과 연애하며 잃어버린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포상 전화를 따고 싶어서 배식 조에 들어갔는데 너무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

요새 책을 많이 읽는데 나와서 나랑 같이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

생일인데 당근 케이크를 먹지 못했으면 자신이 나중에 사주겠다는 이야기.

너무 예쁘니까 자기 없을 때 화장도 하지 말고 머리도 높게 묶고 다니지 말라며 장난치듯 던진 이야기.

공허한 약속들.


네가 책에서 읽고 감명 깊었다며 써서 보낸 문장에 시선을 뺏기고 만다.

인간의 행동을 약속할 순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수는 없다 - 니체

이때 이미 너는 나를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나의 사이가 영원할 수 없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잔인한 문장인가. 왜 저 것을 나에게 전하고 싶어 했는가.


그렇기에 입소 전에 받았던 편지들을 사실 나는 더 사랑한다.

내가 사랑했던 네가 온전히 그곳에만은 남아 있는듯하여서.

너는 참 노란색을 좋아했고 나는 유독 노란 꽃을 좋아했다.

나에게는 항상 노란 편지지에 손편지를 써주곤 했다.

그때마다 민들레며 프리지어며 해바라기를 한 아름 안겨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삶에 치일 때마다 꺼내보며 얼마나 힘이 되었던가, 이 노란 부적들이.


그러나 이제 나는 노란색 종잇장들을 일일이 두려워한다.

글씨 한 자 한 자가 얼음 조각이 되어 눈을 파고든다.

노란 자욱으로 남은 사랑들의 무게가 무겁다.

이렇게 예쁜 말들을 마음들을 꾹꾹 눌러 담아 나에게 보내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너의 노란 마음들을 하나씩 종이봉투에 접어 넣는다.

그렇게 오늘을 갈무리한다.

너의 언어들로 꽉 차 있던 서랍을 비우며.

우리가 사랑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가 헤어졌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너무 선명하게 익은 아픔. 너무 치열하게 남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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