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Live well)

2장 #3 친구

by 단영화

생 살면서 3명의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 말한다.

나 역시 한평생 살면서 친구를 사귀고 싶어 안달복달한 역사가 길다.

3살까지 아주 극악한 난이도의 깡촌에 살았는데, 무려 흙벽에 기와지붕 얹은 집에 살면서 우물물을 썼으며, 근방 5km 이내에 또래 그림자라고는 한 손에 꼽고도 남을 만한 동네였다.

자연스럽게 아주 어릴 때 어울려야 했을 또래 친구들보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더 어울리며 애늙은이 면모를 익혔다.

나이를 먹으며 엄마 친구네 애들이나 유아원 다니면서 친구를 사귀긴 했지만, 인간관계에 적응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

인간이 타고나길 선한 성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성품도 있어서 누군가 다가올 때 의도가 좋지만은 않다는 개념을 나이를 먹고 한참 후에야 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인간관계를 익힐 때 책을 통해 조사하고 그 후에 직접 덤벼드는 악순환에 빠져들었고 눈치가 있는 듯 없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누군들 자라면서 가족 내에서 자리 잡으랴 사회에 적응하랴 힘들지 않았겠느냐마는 남들이 1부터 10까지 중 3 정도의 힘듦을 느꼈다면 나는 거기에 2 정도 덧붙여 힘들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흔히 손톱 옆에 가시가 올라오면 죽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불편하고 아프듯이 삶에서 타인보다 살짝 뒤떨어질 만한 정도의 모자람이 늘 있었다.

어른들 사이에서야 성숙함으로 포장될 수 있던 모양이지만 또래 사이에선 그런 포장이 먹히질 않았다.

어딘가 어색하단 소릴 가끔 듣곤 했는데 아마 기본으로 탑재된 기능이 아니다 보니 상황을 파악하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동안 남보다 대략 3~5초 정도 지연되는 시간을 애들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지금도 어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마음대로 행동해도 될 순간과 생각을 해봐야 하는 순간의 차이가 큰 편이다.

어른이 되면서 후자의 비중은 더 늘었고 가끔 내가 나로 사는지 가면 안에 사는지 헷갈린다.

사회생활이란 다들 가면 몇 개쯤 쓰고 산다고 생각하면 불편하지만은 않다.

어차피 나이 먹는 과정에 언젠가 그렇게 될 일이었다면 더 어릴 때 알았다고 다를 건 없을 테니까.






억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나는 잘 지내기만 한 것 같은데 성장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왕따를 당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잘 지냈다고만 기억하는데 직접 누가 그때 네가 이랬다고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인간관계 개념이 덜 여문 상태로 학교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나고 눈치를 살피다 보니 어른들과 다른 아이들은 눈치 보는 내가 이상했을 수도 있다.

사실 눈치보다는 다른 애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피는 중이었지만 애들은 알 바가 아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친구 사귀기였던 나는 인간관계로 감동한 순간이 몇 차례 있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놀랍고 어마어마한 감정이 파도처럼 머리를 관통하는 괴상한 기분을 겪었는데 바로 친구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최초의 친구를 떠올리자면 7살 무렵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부모님 지인의 딸이었는데, 다행히 시골에서 조금 더 큰-하지만 여전히 시골인-읍내로 이사하면서 처음 어울렸다.

시골과 달리 유아원이면 유치원, 학교까지 또래와 어울릴 일이 많아 여러 사람을 새로 알고 친해졌어도 아직 친구라고 부르는 사이는 없었다.

그 친구는 한쪽 눈에 큰 점이 있었는데 정말 커서 눈 전체를 둘러쌀 만큼 컸다.

자칫 친구들한테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당시에 그 애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커다란 점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돌한 성격에 나와 달리 사랑 많이 받은 응석쟁이였다.

어떤 부분에서 잘 맞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 재밌게 놀고 나서 슈가 하이라도 겪은 것처럼 매일 그 아이 집에 놀러 가자고 난생처음 떼를 쓰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어릴 때 떼는커녕 누가 와서 때리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어린이였다.

오죽하면 내가 울지를 않아서 엄마가 나 어릴 때 일을 많이 했다고 푸념을 하셨겠는가.

시간이 지나고 그 친구가 자연스럽게 나를 멀리했는데 아마 당시 내 감정이 일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흥이 잔뜩 오른 어린이였던 나는 첫 친구라고 여겨서 당시 집착이 무척 심했었다.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의사소통이란 쌍방이어야 서로 즐거운 것인데 당시 나는 나의 즐거움에 심취하여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로 봐서 꽤 일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인간관계와 소통의 즐거움을 혼자 누리다 보니 같이 어울리는 어린이 입장에서 보면 퍽 곤란했을 것이다.

비슷한 일이 학년을 올라가는 내내 반복해서 일어났고 매년 자주 어울리는 친구가 바뀌기 일쑤였다.

전반적으로 다 친하고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정작 아무 때나 만나도 쿵짝이 잘 맞고 즐거운 친구는 없었다.

대부분 눈치가 없던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눈치 없고 감정 조절이 서툰 사람은 어린이라 해도 사람들이 받아주기 싫어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이 순간이 조숙한 어린이가 되는 빠른 지름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실제 나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후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더욱 다양한 문제를 마주했다.

문제 중 최고봉은 역시 남이 아닌 내 문제이다.

어린 시절 친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커서 청소년기에 들어서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여전히 감정은 들쭉날쭉 했고 흥분 상태에 돌입하면 제어가 안 됐다.

마치 롤러코스터의 가장 위험한 구간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타는 것처럼 일정 관계가 형성되면 감정이 급발진을 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풍선처럼 아슬아슬하게 터질 듯 말 듯 견디는 수준의 감정은 섬세한 구분이 어렵다.

세상에 따뜻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참 많다.

제일은 역시 사랑일 것이다.

나는 사랑 안에 속한 감정 중에 애정, 우정, 욕정, 존경, 모정, 온정 등등 수천수만 갈래의 감정을 구분할 줄 몰랐다.

부딪쳐 오는 모든 감정이 행복에 겹다 못해 마음을 인정사정없이 수만 갈래로 찢어진 가느다란 다발로 내리쳤다.

사춘기 청소년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천 번 오르내리고 똑같이 사춘기인 내 마음도 요동치고 주변 친구들의 마음도 요동쳤다.

각종 문제를 끌어안은 친구들은 번갈아 가며 자신의 감정을 부딪쳐 왔고 나는 그 모든 감정을 해결할 수 없었다.

마음이 힘들어 누군가에게 말을 꺼내봐도 대부분 내가 예민하고 유난한 사람으로 끝났다.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에 고통을 토로해도 해결할 수 없다면 모른 척하는 수밖에.

나는 그 후로 필사적으로 고통과 감정이 없다고 여기며 매년 무뎌졌다.

덕분에 나중에 20대를 전부 이때 무시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갈아 넣을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최대한 남들처럼 고통에 민감하지 않고 그냥저냥 무난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 되고자 필사의 노력 끝에 얻은 건 그저 나를 무시하는 내 인생 최대 폭군인 나였지만 말이다.

30대가 되고 나서야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던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

자살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면 가장 길고 가장 고통스러우며 가장 자학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

교우 관계가 엉망진창인 덕분에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올 애정 관계도 만만치 않게 엉망진창이었다.

자세한 건 뒤에서 할 언급할 예정이다.

각자 가장 힘든 시절에 남의 사정 봐줄 인정 많고 성숙한 청소년이 몇이나 될까.

학창 시절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한들 기억도 못하는 이유는 밖의 전쟁보다 안의 전쟁이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등학교 때 정말 친했던 친구가 둘 있었다.

시골에서 도시 학교로 진학한 덕에 같은 중학교에서 온 친구는 나 포함 총 4명뿐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했다.

한 친구는 1학년 때 처음 새로 사귄 친구였고 다른 친구는 친구가 되고 싶어 난생처음 먼저 말을 건 친구였다.

고등학교 내내 붙어 다니다가 대학까지 같이 가서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취업하고 나서야 서로 멀어졌다.

그 후 나는 긴 수험 기간에 돌입했고 둘 다 20대 초반에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나만 덜렁 남아버렸다.

결혼 후에 바로 아이를 갖고 출산했다.

당시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그 친구들의 중요한 행사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지금도 가장 후회하는데 소중한 사람들의 경조사에 못 갈 만큼 중요한 일이 세상에 많지 않다.

그 당시 수험이 정말 인생에서 죽을 만큼 중요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보니 인생에 좋은 사람들과 맞바꿀 만큼은 아니다.

수험에 실패했으니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떨어질 사람은 안 가도 떨어지고 붙을 사람은 가도 붙는다.

중요한 건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확고한가의 문제이지 스스로 괴롭힌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 먹고 남는 건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 감정, 추억뿐인데 그때가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 친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점마다 한 번도 같이 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내 친구들은 아주 멀리 가버렸다.

가장 미안한 건 정말 친했지만 놀자고 얼굴 볼 때면 아이를 같이 돌봐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어울리는 횟수가 줄었던 일이다.

사고의 중심이 나에서 아이로 옮겨가니 모든 게 변했다.

미혼인 나는 결혼 전 우리끼리 어울릴 때만 생각했고 친구들은 결혼하고 자식을 봤으니 당연히 자신의 욕구보다 가정과 아이를 우선시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미혼인 친구를 찾아 나섰고 친구들은 가정에 충실했다.

서로 각자 갈 길로 간 것이다.

사실 내가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카가 생겨서 아주 가끔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아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 건 딱 하나다.

기다림, 단지 그뿐이다.

당시 나는 이기적이고 덜 자란 애송이였다.

달라진 친구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위의 모든 불행과 실수는 내가 성장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삶이란 늘 실수와 시도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정신적으로 성숙하길 거부하고 나를 잃어버린 대가란 이런 것이다.

덕분에 친구 사귀기를 포기한 나는 30대에 완전히 혼자 노는데 통달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뒤에 친구를 사귀는 건 정말 어렵다.

속내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어울릴 수 있는 나이는 고등학교 까지라는 걸 여러 시도 끝에 알았다.

그때가 인간관계에서 실제로 부딪쳐서 얻은 결과를 볼 때 사과로 웃으며 끝낼 수 있는 나이의 최대한도인 듯하다.

사람 간 관계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느 정도 일정 선을 요구하지만, 나는 아직 적당한 선을 긋는 일이 너무 어렵다.

모든 걸 쏟아붓는 관계가 최선인가 하냐면, 살아보니 그 건 절대 아니더라.

그래서 올해에도 나의 최대 난제는 친구 사귀기이다.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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