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 영화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 거실에는 자연스럽게 익숙한 음악 소리가 울렸다.
빰, 빠바바밤-, 빰, 빠바바밤-
누런 흙먼지를 날리며 말을 타고 용맹하게 황무지를 달리는 한 남자 뒤로 사뭇 장엄하다 못해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표현하는 배경 음악이 깔렸다.
그 시절 우리 집 기준 토요일이면 가장 뜨거운 TV 프로그램은 바로 토요명화였다.
한여름이면 삼복더위에 현관이며 베란다 창문까지 활짝 열어놓으면 옆집 아랫집 동네가 같은 TV 프로그램 소리로 대동단결했던 걸 떠올리면 다들 같은 마음이었던 듯하다.
거실 전등을 끄면 유일하게 번쩍이는 TV 불빛이 영화관을 방불케 했다.
그 시절엔 내 세상에 아직 영화관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몰랐지만, 거실에 푹신한 이불을 깔고 엄마랑 동생 셋이 옹기종기 꼭 붙어 앉아 무한반복 중인 광고를 보던 걸 보면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영화는 11시쯤 시작해 빠르면 12시 반, 늦으면 2시가 넘도록 방영했다.
오래된 영화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고 스토리나 캐릭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도 했지만, 흘러가는 영상을 쳐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두근두근 설렜다.
엄마는 대부분 끝까지 시청했지만 대략 7~8세 정도였던 나는 대부분 영화 앞쪽 3분의 1 가량만 기억했다.
실제 본 영화는 엄청나게 많으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즐겨보기 시작한 시점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어린이용 만화영화나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보던 영화도 있었지만 스스로 영화가 궁금하다고 생각한 건 좀 더 후였다.
중학교까지는 영화보다 재밌고 신나는 일이 워낙 많았고 원래 영상보다 활자를 선호했다.
영상이 상상을 방해한다고 여겨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등학교에 가니 갑자기 집에서 모든 예능 활동을 그만두라고 압박이 들어왔다.
강제로 공부 외 활동을 멈추고 나니 인생이 너무 무료했다.
나는 확실히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예체능 활동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면 공부도 재밌는데 공부를 위해 다른 예체능 활동을 그만둬야 한다면 모든 게 하기 싫다.
가뜩이나 어딘가 에너지를 발산하지도 못하는 마당에 하기 싫은 공부도 해야 하니 적잖이 답답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스멀스멀 쌓이던 반항심이 괴상한 루트를 제대로 타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흥미로운 작품은 일본 공포 영화 주온이었다.
부모님도 늦는 주말이었다.
동생도 친구랑 노느라 늦는지 텅 빈 집에 혼자였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거실 구석에 놓은 컴퓨터 앞에 앉아할 일 없이 인터넷이나 뒤지던 참이었다.
누군가 적어 놓은 영화 소개 글의 목록에서 주온을 발견했다.
영화 제목을 읽는 순간, 지루해서 기절하기 직전이었던 나는 이상한 호승심이 일었다.
일부러 거실 불을 끄고 얇은 여름용 이불을 꺼내서 머리에 뒤집어쓰고 작은 책상 의자에 앉아 무릎을 접어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평소라면 절대 볼 리 없는 장르였지만 이상하게 신났다.
기괴한 효과음과 영화는 시작했고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모니터와 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손발은 축축해서 부여잡은 이불자락이 촉촉하게 젖어갔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자 결국 토시오와 눈이 마주치는 시점이 찾아왔다.
당시 얼마나 놀랐는지 소스라치게 놀라서 이불로 빠르게 눈을 가렸다.
손끝 발끝부터 저릿한 감각이 팔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정수리까지 쭈뼛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작은 새처럼 간신히 가늘게 숨만 헐떡였고 놀라서 비명 지르는 것조차 잊었다.
눈이 빙글빙글 돌면서 진공 상태에 갇힌 것처럼 주변 산소가 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정신줄을 놨으면 그대로 조상님 뵈러 직행버스를 탈 뻔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고 얼마 지난 후에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때에야 심장이 크게 요동치면서 박동 소리가 귓가에 북소리처럼 들렸다.
1~2분 사이에 영화보다 요단강 건널 뻔한 것이다.
영화를 멈추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꾹 눌렀다.
다소 공포가 가시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극단의 두려움 뒤에 찾아오는 기묘한 편안함을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숨소리가 평소보다 20배, 30배는 가깝고 크게 느껴졌다.
심장을 누른 손 위로 꼭 내 심장이 튀어나와 펄떡이는 것처럼 나와 심장, 손이 전부 다 각자 다른 생물인 듯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잘게 썰린 고깃덩이가 된 내 영혼의 밑바닥을 손톱으로 긁어 보는 불쾌한 기분과 세상의 속박을 모두 벗어던지고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듯한 자유분방함이 공존했다.
도파민이나 코르티솔, 무엇이라고 칭하는 뇌의 즐거운 자극 호르몬 뭐든 간에 폭발하는 경험이었다.
인간관계에서 파도처럼 오가면서 때리는 감정의 파도가 아니라 태풍과 해일처럼 죽일 듯이 졸라 오는 감정의 자연재해 수준이었다.
그날은 오랜만에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날이었다.
기묘한 경험은 나를 영화의 세계로 깊숙이 끌고 들어갔다.
첫 경험이야 화산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던지는 정도였지만 이후 다양한 작품을 접하면서 책으로 정리하지 못했던 부족한 부분을 구할 수 있었다.
좋든 싫든 인간관계에서 난조를 겪던 내게 새로운 돌파구이자 즐거움, 신세계였다.
그렇게 점차 영화에 빠져들다가 대학 시절에 최고조를 찍었다.
내 인생의 최대 암흑기인 변리사 수험 10년의 블랙홀에 빠지고서야 사그라들었다.
요즘에는 티*이나 *플릭스처럼 아예 한 군데 다 모아놓고 볼 수 있는 OTT 플랫폼을 주로 이용한다.
옛날에 봤던 거부터 최근에 올라온 것까지 재탕, 삼탕 보고 싶은 만큼 보고 또 볼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보통 200번 이상 반복해서 봤다.
또 보라고 하면 아직 100번 더 볼 수 있을 만큼 좋아한다.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나 윌리 윙카와 초콜릿 공장 같은 작품도 좋다.
취향이랄 것이 없어 봤을 때 머릿속에 스파크가 팍팍 튀면서 별사탕이 흩어지는 설렘이 있으면 대부분 다 좋아한다.
완벽한 잡식 취향인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가 하나 있다.
바로 로맨스이다.
요즘엔 나이를 먹어서 그나마 참고 보는 편이지만 어릴 땐 로맨스 영화만 틀어놓으면 수면제가 따로 없었다.
이해도 안 가고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모르겠으니 시작하고 30분이면 쾌속 꿀잠 예약이었다.
이해는 못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첫 생리를 시작하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엄마가 사주는 책에는 새로운 장르가 추가되었다.
남녀 간 이성 관계를 그리는 가벼운 청춘 로맨스였다.
책을 읽는 동안도 신기했고 다 읽고도 신기했고 이해가 안 가니 학교에 가서도 신기했다.
애들은 누가 좋네, 어쩌네, 떠드는데, 좋은 게 뭐고, 좋은 걸 어떻게 알고, 그게 친구랑 놀아서 신나는 거랑 뭐가 다르며, 스킨십을 해서 다른 거라면 친구랑 스킨십을 하면 친구도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친구랑 이야기도 해 봤지만, 너무 깊게 파고 들어서 그런지 질색하고 싫어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궁금한 점을 적당히 알고 지나갈 수 없는 내 성향상 성에 찰 때까지 질문 폭격기가 되었을 테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영화는 그런 점에서 훌륭한 대안이었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아주 훌륭한 예시를 여러 사람을 통해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비록 그 예가 몸서리치게 싫을 만큼 추접하고 별로일 때가 많아서 사랑은 다 이런가 보다 하고 포기하도록 일조하기도 했다.
영화를 제2의 책으로 삼아온 내 입장에선 영화가 아름답고 건실했으면 좋겠다.
안 좋은 이야기만 계속 반복하면 세상이 점점 서글프고 그래서 내 독거노인 라이프의 기정사실화에 박차를 가할 테니 말이다.
오랜 연구 끝에 중학교 2학년쯤 딱 이제 뭔가 시도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불우하게도 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원치 않는 스킨십, 그러니까 강제 추행에 상처 입었고 그 뒤로 아예 연애에 호기심이나 생각 자체를 접었다.
한동안 반복해서 그 상황이 떠올라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 이상 행동으로 조금씩 친구들이 멀어졌대도 어쩔 수 없었다.
내면이 고통으로 시끄러워져서 안이든 밖이든 조용하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다.
한번 생각을 접고 문을 닫으니, 나이를 먹을수록 사랑은 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웠다.
친구 사귀기도 어려운데 사랑이라니 가능이나 할까 싶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어떻게든 조금씩 나아가면 되지만 인간관계처럼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훌륭한 상대방이 필요한 문제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의무는 없고 그래 줄 필요도 없다.
그냥 단순히 얼마나 운이 좋으냐의 문제인데, 나는 아직 운이 좋지 않았다.
한때 운이 좋을 뻔도 했으나 내 상황을 그 애들에게 이해시키기에 나는 미숙했다.
그러니 내가 준비되지 않아 오지 않는 행복을 기다릴 필요도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최근 본 영화 중에 유독 성(性)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작품을 자주 만났다.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상 꼭 필요하니 넣었을 장면이었겠지만 훌륭한 작품에서조차 때때로 성(性)은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짱돌처럼 날아오곤 한다.
내 영혼에 우라늄보다 유독한 상처가 있다고 항의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영화는 주인공인 마츠코가 영화 내내 성(性) 산업 종사자로 나와 꽤 자극적인 장면이 많다.
그녀의 직업이 삶을 설명하고 그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한다.
그녀가 선택한 직업이 마츠코가 삶에서 가장 중요시 여긴 가치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그러한 정성 어린 설득으로 자극적인 장면은 다양한 감정을 머금고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감정을 전달한다.
엔딩크레디트가 내려올 때 뇌리에 남는 건 마츠코의 섹시한 몸매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따스하게 바라보는 마츠코의 사랑으로 가득 찬 눈빛이다.
도가니처럼 사회 고발적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서글픈 이유이다.
아무도 모르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의 숭고한 의지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번 만든 영화는 100년 이상을 간다.
사회의 음지로 숨어든 상처는 당연히 꺼내어 터트려야 사회가 건강하다.
방치하다가 더 큰 상처를 만들면 인간의 몸이 그러하듯 사회는 내장부터 천천히 썩을 것이다.
포식 동물은 작은 동물을 사냥할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야생의 세계에선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으니 당연하다.
인간도 역시 동물이기는 하나 모든 동물 중 유일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최고등(最高等) 동물이다.
사람은 언어가 있어서 사자나 호랑이처럼 매사 최선을 다해 두들겨 패거나 때려잡을 필요가 없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표현에는 늘 차이가 있다.
손자병법에도 맞서 싸우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 한다.
해와 구름이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 내기를 한 옛날이야기의 승자도 결국 해였다.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영혼에 울림을 주는 좋은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문화 예술의 힘은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처음 인간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던 이유는 삶의 고됨을 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노동요가 그렇고 심리 치료에서 음악과 그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눈에 보이고 잡히지만 보이지 않는 문화 예술의 힘은 사람을 한 차원 다른 세상으로 올리는 중요한 열쇠다.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추문은 이목을 끌 수 있지만 사람을 모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