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 5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때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나 아니었으면 넌 그 자리에서 즉사였어~”
한껏 추켜올린 콧대와 양껏 올라간 두 어깨가 으쓱댔다. C는 A를 향해 흘긋대며 느물거렸다. 분명 도움을 받은 처지에 감사함이 당연한데 이상하게 한 대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균열을 보고 놀란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균열이 전부 닫히니 C는 손가락을 거뒀다. 천천히 소파에 깊게 눌러앉으며 양손을 교차해 곱게 포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교차한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였다.
“이제 끝난 건가요?”
“음?”
“균열, 사라졌어요.”
“아~ 아니야. 곧 다시 열릴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매번 닫던가, 없애던가.”
“그럼 매번 닫으러 오시는 건가요?”
“아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아하하하!”
C는 얼굴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자리 잡은 허공 속에 무언가가 빙글빙글 돌았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요동쳤다. 창백하고 긴 손가락으로 모자 아래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짚었다.
“이봐, 내가 엄청 쉽게 했다고 쉬운 게 아니야. 적어도 일만 년 이상 살면서 쌓은 내공이 있어야 하고.. 또~ 내공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느릿하고 낮고 탁한 그로울링이 위협적이었다. C는 모자챙을 검지 손가락 끝으로 살짝 당겨 올려 얼굴 대신 무언가가 빙글빙글 도는 허공을 A 가까이 들이밀었다. 바싹 다가오니 거대한 체구가 산처럼 커다랗게 느껴졌다. 시커멓고 공허한 허공과 마주하니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듯했다. 앞으로 튀어나왔는지 속으로 들어갔는지 무언가 튀어나와 A의 눈알을 잡아챌 듯 섬찟했다.
“그, 그럼.. 어쩌죠?”
“별수 없지. 이 몸이 돕는 수밖에. 너..”
“네?”
“요리할 줄 알아?”
“아, 네! 할 줄 알아요.”
“요리할 줄 안단 말이지.. 좋아!”
C는 위협적으로 바싹 당긴 커다란 몸을 다시 뒤로 누였다. 소파 깊숙이 편하게 늘어져 양팔을 넓게 벌렸다. 팔은 3인용 소파 전체를 덮고 남아서 손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제일 자신 있는 거 만들어 봐.”
긴 다리를 접어 한쪽 위에 올린 후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팔짱을 꼈다. 얇고 긴 양쪽 팔이 교차하니 팔 사이로 빈틈이 듬성듬성했다. A는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확인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며 요리를 시작했다.
얼마 후 A는 모서리가 낡고 해진 나무 쟁반을 들고 거실로 왔다. 소파에 기대다 못해 누운 C는 반가운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벌써 다 된 거야?!”
얼굴 자리의 허공이 기쁜지 빠르게 빙글빙글 돌았다. 너무 기뻐하고 반기니 A는 손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드세요.”
소파 앞에 작업용 작은 협탁을 꺼내 쟁반을 올렸다. 쟁반 위엔 오목하고 두꺼운 하얀색 그릇 하나, 길고 널따란 접시 하나, 작고 깊은 찬기 2개가 놓였다. 하얀 그릇엔 하얀 배추와 무가 시원시원하게 썰어 넣은 주홍빛 국물의 물김치가, 길고 널따란 접시엔 아이 주먹만 한 크기로 뭉친 밥에 양념장을 발라 노릇하게 구운 주먹밥이, 찬기에는 주먹밥에 발라먹을 하얀빛 고소한 소스와 불그스름하고 매콤한 소스가 담겼다. 그릇마다 제 자리를 잘 잡아 정갈해 보였다. 물김치와 주먹밥 사이에 수저를, 쟁반 오른편 가장 위쪽에 물이 담긴 투명하고 작달막한 컵을 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음식을 마주한 C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젓가락을 들어 주먹밥부터 소스를 푹 찍어 얼굴 자리의 허공에 냅다 던졌다. 한입에 먹는 건지 쑤셔 넣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주먹밥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밥 먹을 때 씹는 것처럼 허공이 요동치며 몇 번 이리저리 움직였다. 허공 안에 빙글빙글 돌던 무언가가 더욱 빠르게 돌았다. 꿀꺽 삼킨 듯이 크게 요동친 후 허공이 한번 밝게 빛났다. 연이어 하얀 그릇을 허공에 대고 들이키듯 밀어 넣었다. 물김치는 허공에 닿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A는 그 모습이 신기해 허공에 닿은 음식이 사라질 때마다 집중해서 쳐다보았다. 눈에 힘을 주고 뚫어져라 보았지만 꿀꺽하고 삼키는 소리만 들릴 뿐 들어가는 과정을 볼 수 없었다.
“이야~ 잘 먹었다!”
삽시간에 그릇을 비운 C는 만족스러운지 연신 경쾌하게 웃었다. 쟁반 위 그릇은 설거지한 듯 깨끗했다. 소스까지 박박 긁어먹은 터라 담기 전인지, 먹은 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좋아! 결정했다!”
C는 어안이 벙벙해 눈알만 굴리던 A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영문도 모른 채 C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판이었다.
“계약이다. 내가 균열을 처리해 줄 테니 나에게 간식을 제공해 다오. 어떠냐?”
순진한 청소년 등쳐 먹는 사기꾼처럼 무척 수상한 제안이었다. A는 어깨에 얹은 C의 창백하고 긴 손을 슬쩍 밀어냈다.
“꼭 계약해야 하는 건가요?”
“음...”
C는 다른 쪽 손을 들어 모자 위로 머리를 긁적였다.
“밤의 세계는 대가성이 아주 중요하단 말이지..”
“대가성이요?”
“인간들이 악마와 계약할 때 이야기 못 들어 봤어?”
“하날 주면 하날 내놔라, 이런 건가요?”
“비슷하지. 밤의 세계에서는 뭘 하든 하나의 움직임엔 일정량의 에너지가 들어. 그 에너지를 채우려면 합당한 양의 에너지를 받아야 하지. 균열이 네 삶에 얼마만큼 중요한지 따라서 내가 꼭 받아야 할 에너지가 결정돼.”
“.. 귀신도 밥을 먹어요?”
“아니. 안 먹어도 문제는 없어. 취향의 문제일 뿐이지. 기호식품 같은 거?”
“타산이 안 맞는 거 아니에요? 균열이 저한테 기호식품은 아닐 텐데요?”
“그, 뭐... 중독 같은 거 있잖아. 없어도 문제는 없지만 계속 없으면 큰 문제가 될 만한 거.”
납득한 A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 어떻게 해요?”
“간단해.”
C는 거대한 몸을 일으켜 주방에서 물 한 컵을 가져왔다. 소파에 앉아 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A 앞으로 쭈욱 밀었다.
“자, 골라봐. 눈물, 침, 피, 뭘 내놓을래?”
“.. 네?”
“얼른 골라.”
“.. 얼마나 필요한데요?”
“한 방울.”
“그럼 침..”
“참고로 내가 먹을 거야.”
“눈물로 할게요!”
“켈켈켈-!!”
C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웃었다. A는 당황해서 식은땀이 났다. 살짝 흘겨보고 이를 악물자 C는 얼른 웃음을 그쳤다.
“옛날엔 짓궂은 녀석들이 많았지. 계약한다고 피를 한 사발씩 달라고 하질 않나, 사람 심장을 바치라고 하질 않나...”
말을 돌리며 A의 얼굴을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으로 잡았다.
“필요 없는 건가요?”
C는 억지로 A의 눈을 크게 벌려 뒤집어 깠다. A는 C가 너무 가깝기도 했고 눈이 시리기도 해서 눈을 깜빡였다. C는 A가 눈을 너무 자주 깜빡이자 못마땅해서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눈두덩이와 눈 아래 살을 고정하고 크게 벌렸다.
“그걸 다 먹겠냐? 먹는 쪽 입장에서도 생각해 봐라.”
A는 눈이 점점 시렸다. 눈을 감고 싶은 본능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렀다. 잠시 후 눈물이 쭉 차오르더니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C는 미리 준비한 물이 담긴 잔에 서둘러 눈물을 재빠르게 받았다. 물 위로 톡 떨어지니 눈물인지 물인지 구분할 수 없게 금방 섞였다.
“그렇겠네요. 1L나 되는 피를 마셔야 한다면 계약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
“보나페띠(Bon appétit!)!”
말이 끝나기도 전에 C는 눈물 한 방울이 든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순식간에 잔을 비운 C는 맥주라도 마신 듯 경쾌한 둔탁음을 내며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렸다. 보고 있던 A마저 침을 꼴깍 삼키게 할 만했다.
“계약은 쌍방인데, 저는 없나요?”
“아.. 넌 이미 먹었어.”
“네?”
“아까 일어나자마자 마셨어.”
문득 정신 차리자마자 C가 내민 요상하고 기괴한 맛의 음료가 떠올랐다.
“저는 그럼.. 뭘..?”
“자자, 이미 끝난 일에 미련 두지 말자고.”
“아니, 잠깐만, 저는 뭘..?”
C는 소파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계약은 끝났다. 언제든 균열이 생기면 오도록 하지.”
정장 바지에 손을 깊게 꽂고 거실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창백하고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모자 챙 끝을 가볍게 올렸다.
“자, 잠깐..! 이봐요! 저는 뭘..?!”
“다음에 문제 생기면 보자고, 친구-”
거대한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부유했다. 머리가 천장에 닿자 허리를 숙여 특유의 짙고 탁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연기가 사라지듯 C가 스르륵 공기 중에 흩어졌다.
“잠깐만, 기다려-!!!! 나한테 뭘 먹인 거야-!!!!!!”
가련한 A의 애절한 부르짖음만이 남아 메아리처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