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0

by 단영화

지글지글-


추적추적 초여름 장맛비가 한참이었다. 반쯤 열어놓은 거실의 커다란 창밖에 잘은 빗방울이 들이쳤다. A는 주방에 이동형 인덕션을 내려놓고 한참 불 앞에서 씨름 중이다. 인덕션 옆 스테인리스 볼(bowl)에 잘게 썬 김치와 애호박, 양파, 부추, 밀가루를 넣고 물을 부은 뒤 휘적휘적 저었다. 반죽이 김칫국물에 불그스름하고 먹음직스러운 색을 변했다. 밀가루가 뭉치지는 않았는지 뒤적이며 확인했다. 국자를 들어 반죽을 또르륵 떨궈보니 점도가 적당했다. 인덕션 위에 웍(wok)을 올리고 들기름을 넉넉하게 두른 뒤 열이 오르길 기다렸다. 기름이 달궈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웠다. A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반죽을 떠서 웍(wok)에 얇고 넓게 부었다.


치이익-!


기름에 반죽이 닿는 순간 반죽 테두리가 익으면서 단단한 테두리를 만들어 노릇노릇한 갈색으로 변했다. 반죽이 전부 익기 전에 미리 썰어서 준비한 오징어와 조갯살을 넓게 흩뿌렸다. 해산물 향이 더해지니 침샘이 폭발하듯 침이 분출했다. A는 하마터면 잘 익는 부침개 위에 침을 흘릴 뻔했다.


지글지글-


부침개 익는 소리와 빗소리가 잘 어우러져 이중주를 이뤘다. 기다리는 동안 A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벌써 며칠째 비가 내렸다. 벌써 장마철이 돌아온 것이다.


뒤집개를 웍 옆에 내려놓고 A는 잠시 창가로 갔다. 창틀엔 쏟아진 빗방울이 바닥을 적시고 얼룩을 냈다. 수건을 두 장 챙겨 와 창틀 위에 올려두었다. 비는 계속 들이쳤지만 창문을 닫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보았다. 이마와 코, 눈두덩이, 두 뺨, 입술을 빗방울이 톡톡 건드리며 스쳤다. 눈알에 닿는 느낌이 차고 시원했다. 이물감이 돌았지만 눈감지 않고 멀리 하늘에 잔뜩 몰려든 비구름을 보았다. 집 근처 산엔 A가 자주 가는 산책 코스가 있었는데, 마을이 둘러싼 작은 동산이었다. 구름은 자욱해서 동산의 꼭대기부터 산책 코스 입구까지 짙게 안개가 꼈다. 흐릿해서 실눈을 뜨고 집중해서 봐야지만 산책로 입구 근처 푯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아-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쉬고 창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세수라도 한 것 같이 홀딱 젖었다. A는 잔여 수건을 하나 더 챙겨 와 얼굴을 닦았다. 슥슥 문지르고 빨래통에 수건을 넣으며 시선을 흘긋 돌렸다. 35cm가량 열린 균열이 보였다. C의 마지막 방문은 2주 전이었다. 그날 이후 일주일 정도 균열은 평안했다. 밤의 세계 생물이 나타나거나 A의 세계에 밤이 왔을 때 눈을 감으면 밤의 세계가 열린다거나 하는 불우한 상황은 없었다. 딱 일주일이 지나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균열이 0.5cm가량 아주 미세하게 열리기 전까지. 그 후로 일주일은 일이 바빴다. 갑자기 밀려드는 바람에 균열을 신경 쓰지 못했고 순식간에 또 일주일이 지났다. 어느새 불길한 입을 쩍 벌리고 A를 환영하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A의 일상에 변고는 없었다. C를 호출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A는 매번 균열만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았다.


킁킁-


부침개 반죽이 익었는지 노릇노릇한 냄새가 났다. 후다닥 인덕션 앞으로 달려가 뒤집개를 집었다. 익은 반죽 밑으로 뒤집개를 살살 넣은 뒤 반죽을 한 번에 뒤집었다.


치이익-!


기름과 반죽의 물기가 만나 맛있는 소리가 났다. 찬장에서 넓은 접시를 꺼내 종이 포일을 적당히 잘라 그 위에 올렸다. 인덕션 근처에 작은 상을 꺼내 펼치고 컵과 수저, 두툼한 사기잔을 올렸다. 냉장고를 여니 미리 사놓은 막걸리가 보였다. A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술을 반드시 마셔야만 하는 일도 없었고 술을 즐길 만큼 좋아하지도 않았다. 음식을 즐길 때 곁들이기 적당한 술을 좋아했는데 특히 막걸리가 그랬다. 집에서 독립하기 전에는 비 오는 날마다 종종 전 부쳐서 막걸리 한잔씩 마시곤 했다. 술을 마실 자격도 되고 부모님과 집에서 먹는 거여도 꼭 소꿉놀이하는 기분이었다. 가장 좋은 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한없이 늘어지는 기분을 만끽하고 밖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는 여유겠지만. A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칙-!


플라스틱 불투명한 병의 뚜껑을 돌려서 여니 병 속의 가스가 나왔다. 달큼하고 톡 쏘는 향기가 코를 찔렀다. 병을 기울여 사기잔에 부으니 말갛고 탁한 액체가 쏟아졌다. 한잔 가득 채우고 병은 상 위에 올려두었다. 충분히 익은 부침개를 꺼내 접시에 올리고 새 반죽을 웍에 부었다. 불을 낮은 온도로 조절해 내리고 젓가락으로 노릇노릇하고 따끈따끈한 갓 부친 부침개를 쭉 찢었다. 요량껏 한번 잘 접어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파삭-!


겉은 바삭하고 안은 말랑했다. 입 속에 기름 맛이 폭발하듯이 퍼졌다. 들기름의 거칠고 파릇파릇한 향이 돌자마자 강렬한 김칫국물 맛이 들기름 향을 뒤따라 혀를 강타했다. 보드라운 밀가루 맛이 다 친구를 다독이며 몰아가자 바로 애호박과 양파의 단맛이 몰려왔다. 달짝지근한 채소향을 즐기려 할 때 부추의 알싸함이 뒤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전체적으로 해산물의 감칠맛이 조화를 이루도록 타이밍을 조절한 덕분이었다.


“역시 맛있다~!”


맛에 감동한 A는 호들갑 떨며 사기잔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들었다.


꿀꺽, 꿀꺽-


부침개의 모든 준비를 막걸리가 받으면서 완성했다.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새로 다음 부침개 한입을 준비했다.


“와~ 진짜... 행복하다.”


A는 부침개를 구워가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균열이나 C, 비현실적인 꿈, 밤의 세계 같은 이야기가 방울방울 풍선처럼 망울져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행복은 막걸리 1병을 다 비운 후에야 끝이 났다. 살짝 알딸딸한 A는 인덕션에 불만 끈 채 주방을 빠져나왔다. 거실로 가 소파에 드러누우니 이런 천국이 없었다. 창가 쪽에 머리를 두니 창밖으로 우중충한 색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창틀에 부딪힌 물방울이 계속 얼굴로 튀었다. 술기운이 올라 불그스름한 이마와 뺨이 시원했다. A는 눈을 감고 얼굴에 닿는 시원한 감촉을 느꼈다.


삐-


순간, A는 퍼뜩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거실과 주방 사이에 걸어놓은 시계를 찾았다. 시곗바늘은 아직 오후 4시 32분이었다. 그럼에도 낯설지만 아주 익숙한 이 느낌, A는 등골이 서늘했다.


삐삐-


다시 고개를 돌려 균열을 살펴보았다. 무려 35cm나 벌어졌는데 거기서 뭐가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삐-


요상한 소리는 아주 작고 미세했다. 가느다랗다 못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못 듣고 지나갈 만한 정도였다. 그럼에도 밤의 세계 생물의 울음소리는 귓가에서 들리는 듯 가까웠다. A는 거실을 이리저리 살폈다.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계속 소리가 날 뿐이었다.


삐- 삐-


그때, 귓바퀴가 간질였다. A는 뭔가 싶어 손으로 귓바퀴를 긁었다.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인가 싶었지만 기묘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A는 계속 귓바퀴 주변을 만지작대다가 뭔가 싶어서 귓바퀴를 만진 손가락을 자세히 살폈다. 거의 티도 나지 않는 정도의 아주 작은 물기였다.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A는 손가락 끝을 눈앞에 바싹 가져다 대고 집중해서 노려보았다.


삐-!


귓바퀴를 간질이던 것은 밤의 세계 생물체였다. 천진난만하게 삐, 삐 소리를 내는 생물체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다. 반투명한 몸체는 달걀처럼 타원형이었다. 몸 전체에 투명한 돌기가 났는데 사방으로 굴러다니는 듯 움직였다. 만약 몸까지 투명했다면 A는 절대 이 밤의 세계 생물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몸체 안에 까만 점처럼 무언가가 빠르게 박동했다.


삐-! 삐삐-


크기가 작은 걸로 봐서 분명 이 친구는 무리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을 때 다른 밤의 세계 생물체의 소리가 났다. 귓가에서 가깝게 들리는 걸로 봐서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톡, 톡톡-


이마에 떨어진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A의 시선을 끌었다. 작은 물방울 사이에 이 밤의 세계 생물체가 여러 마리 섞여 A의 얼굴과 몸으로 쏟아지는 것이었다.


“뭐야... 또 너네냐...? 왜 너넨 자꾸 나한테 덤벼드는 거야...?”


술이 들어가서 살짝 정신을 놓은 A는 밤의 세계 생물체를 떨어내기가 귀찮았다. 어차피 균열은 이미 35cm가 열렸다. 이게 아닌 뭐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조금 놀랐지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었다. A는 얼굴에 떨어진 빗물을 손난로 슥슥 닦아서 모았다. 다른 손을 펼쳐 손바닥 위에 올려두자 꼬물꼬물 움직이는 밤의 세계 생물체가 여럿 보였다. 하나씩 둘 때는 몰랐는데 반짝반짝 빛까지 내며 서로 반응하듯 움직였다.


“오~ 신기하다..”


쳐다보고 있으니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A는 계속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을 쓸어 담았다. 얼마간 반복하니 손바닥에 올릴 자리가 부족했다. 거실 한쪽 구석에 방치한 지 오래된 투명한 유리병을 물로 헹궈서 가져왔다. 손에 든 밤의 세계 생물체를 유리병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기본적으로 밤의 세계 생물체는 발광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반딧불처럼 자체적으로 빛을 내면서 서로 소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A의 핸드폰에 알람이 떴다.


“음..?”


연락할 사람이라곤 정해져 있어서 부모님 아니면 동생, 그도 아니면 친구, 이 외에 일 관련 연락 중 하나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A는 알람을 본다고 한들 잘 확인하지 않는 편이다. 밤의 세계 생물과의 조우가 긍정적 영향을 끼친 건지 호기심이 넘치던 A는 오랜만에 연락을 받자마자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전에 소개팅했던 00입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연락드렸어요.]


A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연락이 왔다는 사실보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소개팅했던 사실 자체를 깜빡했다는 걸 상대방 연락을 받고 이제야 기억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었다. 소개팅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떻게 연락할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잘라낸 듯 깨끗하게 소실됐다. 당황한 A는 머릿속이 멍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요. 그날은 잘 들어가셨어요?]

[네, 별일 없이 잘 들어갔어요. 집에 가서 생각해 보니까 제가 좀 무례했더라고요. 늦었는데 연락도 없었고..]

[아니에요. 그날 즐겁게 놀았으면 됐죠.]

[소개팅 후에 연락이 없으셔서.. 좀 그렇더라고요. 생각이 많았어요.]

[빌리는 잘 지내요.]


A는 후다닥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 창틀에서 한참 빗물 샤워 중인 로즈메리 화분 사진을 찍었다. 메신저 창에 화분 사진을 올려서 보냈다.


[전보다 건강해 보이네요. 화분은 키운 지 얼마나 됐어요?]

[1년 정도요. 사실 워낙 똥손이라 더 많았는데 얘 하나 남았어요.]

[아는 사람이 화원을 해요. 좀 더 쉬운 화분으로 들여보세요.]

[괜찮아요. 지금 키우는 화분도 벅차서 저한테는 무리예요. 고마워요.]

[나중에 생각 바뀌면 말해요.]

[알겠어요. 기억해 둘게요. 오늘 비 오는데 부침개 좋아하세요?]

[비 오는 날에, 부침개에, 막걸리까지 좋죠.]


이번에는 후다닥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접시 위에 곱게 올려둔 부침개 사진을 찍었다. 역시나 메신저 창에 부침개 사진을 올려서 보냈다.


[직접 만들었어요?]

[당연하죠. 저는 이미 부침개 먹고 막걸리도 한잔 했어요.]

[혼자요?]

[운치 있지 않아요?]

[그렇네요.]

[퇴근 시간 전인데 회사 아니에요?]

[네. 회사예요.]

[힘내시고, 비 오니까 퇴근길엔 안전운전입니다!]

[네.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요.]


연락을 마무리할 즘 A는 이미 술이 올라와 얼굴이 새빨갰다. 몽롱한 상태에서 반은 꾸벅꾸벅 졸았다. 밤의 세계 생물들이 빗방울처럼 A 위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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