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1
“정신 차려, 이 녀석아-!!!!!!!!!”
술기운이 가시기도 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전날 마신 막걸리의 여파로 A는 소파에 누운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2주나 자릴 비웠던 C가 다음 날 새벽녘 일찍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널브러진 채 밤의 세계 생물들에게 파묻혀 가는 A의 보고 분노가 치솟았다. 바빠서 잠깐 눈 돌린 사이 이 모양이 된 것이다.
“흐-아-!!”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더니 아예 파묻혔어-?!!!!”
“예, 예에-??!!”
A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를 번쩍 들어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폈다. 열어 놨던 창으로 C가 긴 다리를 넣으며 궁시렁거렸다. 밖엔 아직 비가 내렸다.
“조심성이 없어, 조심성이~ 이야기를 해주고 가면 뭐해??!! 이 모양일 거면 호출은 왜 있어?! 어?! 벙어리가 된 거야, 뭐야?”
C는 거실로 들어와 A 머리 위와 주변에 가득 쌓인 밤의 세계 생물들을 탈탈 털어냈다. 짜증스러운 C는 베개 털 듯이 A를 인정사정없이 퍽퍽 쳐댔다. 밤의 세계 생물들의 크기가 워낙 작아 먼지처럼 공기 중으로 쉽게 휘날렸다. 바람에 흩날리며 요동칠 때마다 밤의 세계 생물은 맥동하듯 한꺼번에 반짝였다. 여린 푸른빛이 새벽녘 거실을 희미하게 밝혔다. C는 휘날린 생물들이 전부 공기 중에 뜬 걸 확인한 뒤에 창백하고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손끝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샛노란 빛줄기가 이어졌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밤의 세계 생물들을 아울렀다. 동그랗게 빙글빙글 돌면서 형태를 잡아가더니 완전한 구형을 이뤘다. 점점 빠르게 돌면서 크기를 압축하듯 줄여갔다. 어느 순간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줄자 C는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으로 꿀꺽 삼켰다.
“기왕 모을 거면 한 끼 정도 되는 걸 모으면 안 되냐? 이건 뭐 강제 다이어트도 아니고 먹어도 허기가 져.”
밤의 세계 생물은 손쉽게 처리했지만, C는 불만족스러워 투덜거렸다. A는 신기해서 호기심으로 반질반질한 눈으로 C가 밤의 세계 생물들을 처리하는 광경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와- 이런 걸 가르쳐 주는 게 어때요? 나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드디어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은 거야? 밤의 세계로 올래?”
“아.. 아니요.”
A는 머쓱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일어나 소파에 똑바로 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씻지도 않고 잠든 바람에 얼굴은 퍼석했고 입은 텁텁했다.
“먹을 거 있으면 내놔. 아이고, 기운 딸려-”
C는 A 옆에 앉아 널부러졌다.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살짝 틀어 A를 보고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어쩐지 무척 거만한 표정을 지었을 듯한 느낌이었다. A는 살짝 흘려보고 주방으로 향했다. 작은 상에 올려놓고 그대로 방치한 부침개가 A를 반겼다. 차갑게 식은 부침개를 다시 웍에 넣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뚜껑을 닫고 데워지길 기다리면서 거실로 돌아왔다.
“잠깐만 기다려요. 5분이면 금방 데울 거에요.”
C는 킁킁대며 집에 벤 기름 냄새를 맡았다.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납작하게 튕기며 입맛을 다셨다.
“어디 갔다 왔어요? 계약한 날부터 2주나 걸린 거 알아요?”
막간을 이용해 타박하자 C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는 기세 좋게 그칠 줄 몰랐다.
“2주나 걸렸단 말이지... 균열은 잘 지켜봤어?”
“저도 바빴어요. 일주일 동안은 그대로였는데 다음 일주일 동안 일이 많아서 못 봤어요. 그 사이에 갑자기 이만큼 벌어졌더라고요.”
균열을 가리키니 C는 소파 위로 축 늘어졌던 고개를 돌렸다.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이 놀란 듯 위로 살짝 튀어올랐다.
“... 뭘 하면 균열 열리는 시간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빨라질 수 있는 거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C의 말투가 묘하게 열받았다.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요. 그냥 알아서 열린 거예요, 알아서. 저절로!”
“너는 참... 재주가 대단하구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A는 C야말로 앉은 자리에서 사람 성질을 박박 긁는 대단한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주한 지 10분 만에 3번 이상 혈압을 올릴 수 있다니 대단하다 못해 훌륭했다. 밉거나 싫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C를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 그래서 어디 갔다 오셨다고요?”
길지도 짧지도 않은 30년 남짓한 인생에 누군가를 삐딱하게 대할 수 있는 대담함은 덤으로 얻었다.
“... 균열 원인을 찾았잖아. 나도 보고해야 할 대상이 있어.”
C는 다시 소파에 늘어져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을 가늘고 길게 늘어뜨렸다.
“직장 상사 같은 거예요?”
“뭐... 상사보다 지배자 같은 개념이지. 종속됐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봐야지. 만약 그가 밤의 세계 내 자기 영역을 돌보지 않으면 나도 소멸할 테니까. 그의 영역에 변고가 생겼으니 돌봐달라고 보고해야 관리를 해.”
“자기 영역 내인데 무슨 일이 생겨도 몰라요?”
“알지. 아니까 나 같은 귀신을 부려서 알아 오라고 파견 보내잖아. 신이라고 해도 영역 내 이상 현상에 대응하고 관리하려면 인과 관계나 원인을 자세히 알아야 해.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리에 들어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해. 그럴 거면 방치가 나을 수도 있지.”
“직접 오갈 순 없어요? 빨리 와서 확인하고 빨리 해결하면 더 좋지 않아요?”
“말했잖아. 신들은 자리를 함부로 비울 수 없어. 밤의 세계에서 신은 일정 영역의 질량을 감당하기 위해 존재해. 쉽게 말하자면 우주를 떠받치는 아틀라스 이야기처럼, 밤의 세계 신들도 그런 역할을 맡은 거야. 어느 정도 정해진 범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그래서 영역 내 귀신이나 밤의 세계 생물들은 신의 부름을 받고 명령대로 영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해서 자기 영역의 신에게 전하는 거야. 그게 싫다면 해당 영역의 신이 아닌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면 돼. 강제성은 전혀 없지. 하지만 한 영역을 떠난다고 한들 다른 영역에 또 다른 신이 존재할 거야. 없다면 그 영역 내 가장 큰 에너지를 가진 존재가 영역의 신으로 자라.”
긴 이야기 끝에 C는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 끝을 살짝 들어 주방을 흘긋 보았다. A는 이야기에 빠져 집중하다가 문득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부침개가 생각났다. 벌떡 일어나 후다닥 주방으로 달렸다. 노릇노릇하게 잘 데워진 부침개를 접시에 다시 올리고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더 꺼냈다.
“먹어봐요. 어제 만들었어요.”
“잘 먹겠습니다.”
작업용 작은 협탁을 꺼내 접시와 잔을 놓자마자 C는 기쁘게 젓가락을 들었다. 바삭바삭 맛있는 소리를 내며 부침개가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C는 한껏 흥분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신한테 갔다 오는 길은 멀어요? 오래 걸렸잖아요?”
“음... 이번 여정이 특히 오래 걸렸지. 원래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해.”
“2주나 걸린 이유가 뭐예요?”
“균열 때문이야. 돌아가는 길에 몇 번이나 길을 헷갈렸는지 차원을 오가느라 정신이 다 없었어.”
“다음에도 오래 걸려요?”
“그럴 리가. 이 몸은 같은 짓을 두 번, 세 번 반복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아.”
C는 거드름을 피우며 한 번에 막걸리가 든 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크-! 막걸리 맛이 기가 막히네!”
만족스러운 듯 접시가 깨끗했다. C는 몇 차례 배를 두드리며 균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못마땅한지 얼굴 위치의 허공을 신경질적으로 통통 튀기기를 반복했다. 창백하고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적였다. 벌어졌던 균열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안에서 쏟아져 나오던 불쾌한 냄새도 자취를 감췄다.
킁킁-
거실로 돌아온 A는 균열이 사라지는 장면을 구경하다가 불쾌한 냄새를 맡았다. 균열을 닫았지만 쿰쿰하고 쾨쾨한 냄새였다.
“균열에서 나는 냄새인 줄 알았더니... 아유, 좀 씻고 다녀요!”
밤의 세계를 통해 풍기던 지독한 냄새가 C에게서도 폴폴 올라왔다.
“아, 아니- 잠깐! 이봐!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C는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A는 C를 억지로 소파에서 일으켜 질질 끌고 욕실에 밀어 넣었다. C의 긴 팔다리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가뜩이나 비좁은 욕실에 낑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A는 망설임 없이 샤워기를 틀었다.
“아잇, 참- 나!”
“조금만 참아봐요!”
C는 옷을 입고 구두까지 신은 상태였지만 샤워기로 물을 뿌려도 옷가지는 젖지 않았다. 애초에 옷까지 한 번에 세탁하려던 A는 C 보고 나중에 씻기 전에 옷을 벗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생각과 달리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C의 옷은 그대로였다. 반면에 물에 닿은 C는 피부가 촉촉했다.
“별 소용 없다니까 그러네!”
물 온도가 금방 적절히 맞춰졌는지 욕실은 김으로 가득 찼다. 모락모락 피어나 시야를 가렸지만, 개의치 않는 듯 A는 꿋꿋하게 제 할 일만 했다. 동그란 샤워볼에 비누를 박박 문질러 거품을 풍성하게 냈다. 한 손에 샤워볼을, 다른 손에 비누를 쥐고 C의 몸에 대고 박박 문질렀다.
“아, 아야야-! 아야!!!!!!”
C는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욕실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A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하도 요란을 떠는 C를 보며 A는 어릴 적 키웠던 반려견이 생각났다. 엄살이 심해서 꼬리에 손만 대도 난리가 났었다. 목욕이라도 하는 날이면 전쟁 수준이어서 귀에 피가 날 지경이었는데 지금 딱 그랬다.
“거 다 큰 어른이...! 좀 조용히 해요!”
“아프다고-!!!!!!”
한참 실랑이 끝에 빠르게 목욕을 끝냈다. 끌고 나와 타월로 젖은 피부를 두드려 말렸다. C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멍하니 A가 하는 타월질을 지켜보았다.
“원래 얼굴이 없어요?”
A가 말을 걸자 C는 정신이 들었는지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이 윙윙 돌았다.
“아주 오래전엔 있었어.”
“지금은 왜 없어요?”
“필요 없어서.”
“이름은 있어요?”
“아주 오래전엔 있었지.”
“이름도 필요 없어요?”
C는 말을 잇지 않고 지그시 A를 내려다 보았다.
“귀신 얼굴하고 이름은 알아서 좋을 게 없어.”
짧은 말 한마디로 대답을 일축했다.
“이미 계약도 했는데요?”
“지금 쓰는 호칭인 C나 얼굴 자리의 허공은 일종의 보호막이야. 산 사람이 알아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괜히 업만 쌓이고 인과 연만 생겨서 윤회에 지장만 줄 뿐이다.”
대충 물기를 닦아내자 C는 A를 밀어냈다.
“엄한데 관심 두지 말고 균열이나 잘 봐.”
퉁명스럽게 한 마디 담겨두고 긴 다리를 창밖으로 성큼 던졌다. 새벽녘 어스름한 빛 틈으로 C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A는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비 오는 풍경을 꽤 오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