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2
똑, 또독,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A는 귀를 쫑긋 세웠다. 소파에서 빈둥거리던 A는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인적이 느껴졌다. A는 현관문 안쪽 외시경 가까이 눈을 대고 몸을 바싹 붙였다.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 살짝 가쁜 숨을 정리하는 호흡, 장난기 가득 섞인 분위기.
“누구세요-?”
“피자 배달이요-”
“누구요?”
“배달이요-”
“네-??”
“문 열어-!!!”
“서프라이즈-!!!!”
A는 문을 활짝 열었다. 두 손 들고 환영의 인사를 했다. 문 앞엔 피곤한지 눈 밑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표정은 밝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양손 가득 먹고 마실 간식거리를 건넸다. 시간적 여유가 없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얼굴 보는 유일한 친구였다. 유능해 회사에서 일이 많다 보니 사실상 얼굴 볼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외향적인 성격이라 A 외에도 친구가 많아 대기 줄이 길다는 점 빼고 A와 친구는 성격이 잘 맞았다. 특히 A는 가끔 이상한 요청을 하는데 오히려 친구는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
“초대장 보여주시죠.”
집에 들이기 전에 A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친구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매끈하게 코팅된 티켓을 한 장 내밀었다.
“정성이 장난이 아니다, 너?”
“거의 석 달 만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친구가 내민 티켓을 받은 A는 5분의 1 지점의 점선을 따라 쭉 찢었다. 5분의 4 부분은 가져가고 5분의 1 지점을 다시 친구에게 건넸다. 친구는 5분의 1 티켓을 받으려고 했으나 양손 가득 짐이 들렸다. A는 얼른 친구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 주방 바닥에 내렸다. 구석에 짐을 치우고 A는 미리 준비해 둔 음료 잔을 들고 왔다.
“반갑습니다~ 이번 영화 마*가*카르 투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 이건 뭐야?”
길고 투명한 잔에는 푸르른 하늘색과 진한 보라색, 뽀얀 하얀색이 적절히 섞여 시원하고 상큼한 색의 음료가 담겼다. 투명하고 단단한 얼음과 작은 큐브 조각, 싱싱한 로즈메리 허브의 여린 잎줄기가 조화롭게 어울려 먹음직스러웠다.
“웰컴 드링크입니다, 손님~ 드셔보시지요~”
친구는 음료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두말없이 쭈욱 들이켰다.
꿀꺽- 꿀꺽-
더웠는지 친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들러붙었다. A는 말없이 수건을 준비했다.
“와, 이거 뭐야? 맛있다~!!”
“그치, 그치?! 나만의 편의점 꿀조합이라고!”
“크림소다맛인데, 코코넛 향이랑 탄산이 조화로워서 엄청 시원하다. 야, 이거 나중에 팔 거야?”
“그건 생각 좀 해 보고.. 원가가 안 맞아.”
친구는 꽤 많은 양의 음료를 싹 비웠다. 수건을 들고 기다리던 A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수건을 받았다.
“장마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다.”
“진짜 더워.. 와~ 이 날씨에 여행 간다는 사람들 대단해..!”
“원래 한여름, 한겨울 휴가는 집에서 보내는 거 아니야?”
“넌 어디 가자고 안 하면 1년 365일 집에서 보내잖아.”
“시간과 노력을 허튼 데 쓰고 싶지 않을 뿐이야. 결과가 없잖아, 결과가!”
“자기만족이나 너의 영혼을 위한 여행은 없는 거야?”
“친구야, 내 영혼은 내가 준비한 여행에 대한 타인의 행복과 만족감을 먹고 산단다. 다 네가 바빠서 아니야! 여행 가려면 네가 시간이 나야 여행을 준비하든가 말든가 하지!”
“1년에 3일 휴가 내기도 어려운 사람한테 그런 말 하지 마라, 이 잔인한 여자야...!”
“그나저나 이번에 웬일로 3일이나 휴가를 받았어?”
“휴가 주겠다고 이야기만 한 게 벌써 3년인데, 줄 때도 됐지. 만날 말만 하는 팀장님,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번에도 못 쉴 뻔했는데 드디어 휴가를 쟁취했다고!!!”
A는 안쓰러운 눈으로 친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악!! 동정하는 눈빛 보내지 마!! 지겨워!!!!”
A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친구의 등을 토닥였다.
“회사 일은 잊어버려. 너는 오늘 영화 마*가스*카*르 투어에 온 손님이니까.”
“아, 회사에서 초대장 받고 웃겨 죽는 줄 알았어. 뭐야, 이건?”
친구는 5분의 1 가량의 티켓을 A 눈앞에 흔들었다.
“뭔가 재밌는 걸 해 보고 싶더라고. 3년 만의 휴가에 3개월 만에 보는 얼굴, 뭔가 좀 특별해야 하지 않아?”
“그래서 영화 투어를 준비했다?”
“초대 티켓도 내가 만든 거야. 요즘엔 돈만 주면 별의별 거 다 만들 수 있는 거 알아?”
“와, 정성이 대단하다.”
“원래 윌* 웡*를 하려고 했는데, 여름이라 초콜릿 형태 유지가 어렵겠더라고.”
“겨울에 시간 되면 그것도 해. 꼭 초대하고.”
“아직 여름 투어 시작도 안 했는데 만족도가 높으신가 봐요, 손님?”
“아까 그 음료 한 잔에 이미 혹 했어.”
“마음에 드셨다면 다음 순서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손님.”
A는 미리 벽에 걸어 볼 수 있게 준비한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웰컴 드링크를 시작으로, 이어질 스케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것은 영화 투어 1일 차 일정일 뿐이었다.
“안녕? 나는 00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 안녕? 나는 A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A의 인생에 최초이며, 최장이며, 최후의 친구를 만난 역사적 순간. 갈색으로 그을린 동그란 얼굴에 짙은 눈썹, 단추처럼 까맣고 동그란 눈, 통통한 뺨은 발갛게 상기됐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진한 보라색 바탕에 검은색 줄무늬 투피스를 입고 하얀색 레이스 스타킹에 빨간색 에나멜 구두를 신은 여자아이였다. 고작 5살치고 길쭉하고 튼실한 게 A보다 머리 하나는 쑥 올라가서 꼭 7살 정도로 보였다. A는 유아원을 다니지 않아서 친구가 많지 않은 터였다. 먼저 인사하거나 어울리는 편도 아니어서 주로 혼자 놀곤 했다. 상상의 친구나 상상의 공간을 만들며 혼자 보내는 시간을 만끽했다. 어느 날, 엄마가 머리 하러 미용실에 갔던 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투명하고 얇고 깊은 플라스틱 통 안에 미로를 만들고 투명한 물을 채우 은색 작은 구슬을 굴려 목적지에 도착하는 오락기였다. 투명한 물 안엔 파란색과 보라색 반짝이가 들어서 흔들 때마다 빛을 반사해 시선을 끌었다. 한참 정신없이 집중하던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재밌어?”
당돌한 꼬맹이 친구는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미용실 벽에 딱 붙여 쓰는 의자로 다가왔다. 짙은 밤색 쿠션의 세 좌석이 나란히 붙은 의자로 A 옆엔 이미 대기 중인 어른이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무척 당돌한 꼬맹이 친구는 A 곁에 앉은 어른과 A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A는 하던 오락기를 멈추고 친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해볼래?”
“어떻게 하는 거야?”
A는 게임기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은색 구슬을 움직였다. 지켜보던 친구는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 A가 장난감을 건네니 친구는 집중해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심심해진 A는 친구가 장난감 가지고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00아~ 친구 장난감 뺏으면 안 되지~”
A가 하염없이 기다리자, 친구의 엄마는 친구를 달랬다. 친구는 머쓱해서 얼른 A에게 장난감을 돌려주었다.
“우리 집에 이거 말고 다른 장난감도 있어.”
친구는 A 눈을 빤히 쳐다보며 눈웃음 지었다.
“놀러 올래?”
“응, 그래.”
“엄마-!! 나 친구랑 집에 갈래!!!!”
친구는 이제 막 커트 보를 두르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뭐? 집에 간다고?”
“집에 장난감 많단 말이야!! 친구랑 놀래!!”
친구의 엄마는 A의 엄마를 흘끗 보았다. A의 엄마는 눈치를 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엄마도 A의 엄마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집 가서 조용히 놀고 있어. 저지레 하지 말고.”
“와아~!!!! 집 가자~!!!”
친구는 먼저 의자에서 내려와 A의 손을 잡아끌었다. A는 친구의 손에 끌려 미용실 근처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야, 일어나! 지각이다!”
늘 그렇듯 A는 친구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침대 위엔 예상대로 친구가 널브러져 곤히 잠들었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A가 들어와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 미동도 없었다. A는 침대로 다가가 친구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더 늦으면 지각이야-!! 일어나-!!!!”
“아-야야야-!!!!! 악!!!!”
괴로운 듯 친구는 발버둥 쳤다. 몸은 절대 일으키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A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고개를 돌렸다. 놓칠 리 만무한 A는 친구의 몸 위로 엎어져 도망을 원천봉쇄 했다.
“어딜 도망가-?! 일어나-!!!”
“아~ 조금만 더...! 나 아침에 잤어... 으어...!”
기운이 좋은 친구는 아등바등 A를 밀쳐내려 사력을 다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A는 어쩔 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엎어졌던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지탱하고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꿈틀거리는 친구가 보였다. A는 굳게 마음을 먹고 단호하게 친구를 노려보았다. 절도 있게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누가 아침에 자래-! 일어나-!!”
“시, 시험 공부 한다고 늦게 잔 거야..! 악, 야...!”
“일어날 때까지다-!!!!”
“가, 간지러워~!!! 아악~!!! 살려줘~!!!!!”
처절한 외침에도 A의 결단은 친구가 일어나 당장 학교 갈 준비를 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이어졌다.
“아침마다 도대체 무슨 난리야?!”
“넌 왜 아침마다 쫓아와서 사람을 괴롭히냐?!”
익숙하게 교복을 챙겨 입고 등교에 나선 두 사람은 아침부터 투닥거렸다. 대충 구겨 입은 교복이 거슬렸는지 A는 친구의 셔츠 깃을 빼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반쯤 튀어나온 셔츠 자락을 교복 치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넌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다녀.”
친구는 A를 흘끔 쳐다보다가 입가에 붙은 빵 부스러기를 툭툭 털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너도 만만치 않아. 나는 단지 아침에 무척 취약할 뿐이라고. 다른 건 다 괜찮아.”
“그게 가장 큰 문제 아니야? 고등학생인데?”
“알겠어, 알겠어. 참, 내.”
최초의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초,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던 A와 위로 오빠만 셋에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더 있던 친구는 죽이 잘 맞았다. A는 장녀로 독립적인 성격에 조용하고 얌전해서 여성스럽게 보고 다가오는 친구가 많았지만 속을 보면 그렇지 않았다. 친구는 위아래 남자 형제만 있어서 활발하고 쾌활했지만 친구 또한 속은 그렇지 않았다. 친구는 거친 남자 형제들 사이에 치이고 상처받을 때면 우는 일이 많았고 A는 그런 친구를 잘 달래주었다. 생각에 복잡함이 없어 복잡한 일을 단순화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A는 귀찮은 일에 자주 휘말리곤 했는데 친구는 그런 방면을 정리하는데 탁월했다. 학교나 동네에서 생기는 모든 사건, 사고가 친구의 형제들 손을 반드시 거쳐 갔고, 위풍당당하게 자라라 하시던 친구의 아버지 가훈 따라 친구도 강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