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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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로 햇살이 부서진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살이 보송하게 느껴지는 산뜻한 날이다.
오늘은 호정의 2차 시험 이틀 중 마지막 날이다.
일찌감치 호정이 나가고 다정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린다. 컵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반짝거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본다. 공모전 마감도 끝났고, 호정과 화해도 했고.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이다. 공모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이렇게 마음 편히 여유를 즐길 생각이다. 그런데.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다.
정청란씨 따님 되시죠? 여기, 대한대병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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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이 병원 의자에 앉아 있다. 헝클어진 머리에 눈물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 짝짝이로 신은 슬리퍼에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카디건.
병원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왔지만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지방에 볼 일 보러 갔다는 아빠는 서둘러 오는 중이었고, 호정은 아직 시험을 보는 중이었다. 다정은 무서웠다. 철저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 설마 아파서 주택 물려준다고 한 거였어?‘ 다정의 머릿속에 한 영상이 떠올랐다. 엄마가 의사의 진단을 듣고는 실의에 빠진다. 이내 차분해진 표정으로 집안 장롱 안에 모셔놨던 재산 관련 서류들을 정리한다. ‘왜 이제야 눈치챘지?’ 다정은 가족을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다정은 엄마 없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늘 가정의 중심이었다. 든든하게 서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같은 존재였다. 그 나무가 태풍에 꺾이는 그림이 순식간에 다정 눈앞에 펼쳐졌다. 다정은 무너졌다.
눈물이 폭포처럼 다정의 얼굴을 뒤덮었다. 주변은 하나도 의식되지 않았다. 다정은 5살 난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때였다.
“언니!”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호정이 내려 다정에게 달려왔다.
“호정아!” 다정이 벌떡 일어나 호정에게 달려갔다.
“호정아, 엄마 어떡해. 엄마 죽지 마, 엄마아아아아!!!!” 다정이 호정을 껴안고 목이 터져라 울었다. 호정이 다정의 등을 손으로 다독이며 말했다.
“언니, 맹장 터졌다고 안 죽어. “
“어허어엉…어…? 맹장?“ 다정은 울음은 그쳤지만 여전히 우는 표정을 하곤 물었다.
“근데 왜 여기 있었어? 수술실 앞에도 의자 있던데.“ 호정은 의아한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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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수술에 들어가고 뒤늦게 병원에 도착한 다정은 패닉 상태였다. 다짜고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정청란씨 어디 있어요?’라고 다급하게 물었다. 아쉽게도 다정의 손에 붙들린 사람은 단지 병원 옆을 지나다 화장실이 급해 들어왔을 뿐인 행인이었다. 공교롭게도 병원 관계자들과 똑같은 색깔의 옷차림이었다. 그는 한 손은 바지춤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대기실을 대충 가리키며 “저기, 저기로 가보세요”라고 하곤 다정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대기실? 기다리라는 건가’ 다정은 홀린 듯 대기실에 앉았다.
다정이 온갖 망상을 하며 슬퍼할 동안 시험이 끝난 호정은 아빠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왔다. 제일 먼저 도착한 다정보다 더 빨리 상황파악을 끝낸 호정은 이미 보험 서류 파악까지 끝낸 상태였다. 다정은 얼굴이 빨개졌다.
‘오늘뿐만이 아니야.‘
호정의 손에 이끌려 엄마가 있는 병실로 가면서 다정은 생각했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고, 부모님 가게 새로 시작했을 때도, 내 등록금 모자랐을 때도…‘ 다정은 고개를 숙였다. ’집안에 큰 일 생기면 늘 호정이가 나서서 뭐든 척척 처리하곤 했지.’
늘 함께 있고 싶다고, 우리 가족 사랑한다고, 늘 말로 하는 다정보다 어쩌면, 호정의 저 묵묵한 책임감이 더 큰 사랑 표현 아닐까, 다정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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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엄마 죽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다정이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어이고? 이 년이 별소리를 다하네.”
“하하하, 오늘은 그 년 소리도 용서가 되네.“
“년년년!”
“그래, 엄마! 백 년 만 년 건강하게 같이 살자!”
호정은 병실 안 냉장고를 정리하며 다정과 엄마의 대화 소리를 들었다. ‘언니는 어떻게 저렇게 민망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호정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고마웠다. 이제 막 깨어나 축 처져 있던 엄마가 다정의 몇 마디에 금방 기운을 차렸기 때문이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아빠 사업 망했을 때도, 내가 직장을 때려치웠을 때도. 그늘진 마음이 오래가지 않았지, 언니 덕분에.‘ 호정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싸움을 끝낸 건 결국 언니였고.‘
어쩌면 가정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저런 따뜻함이 아닐까, 호정은 평소에는 잘하지 않던 생각이 들었다. ‘시험이 끝나서 그런가 봐.’ 호정은 전보다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병실이었지만, 오랜만에 세 모녀가 함께 하는 밤이었다.
계속.
안녕하세요, 유이음입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마지막화인 24화까지 매일매일 연재될 예정입니다. 21화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라이킷과 댓글, 작가 소개 옆 구독 및 알림 버튼>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