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서 만나자
1화 보고 오기
어느덧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이 다가왔다. 새해를 코 앞에 두고 우리 동네에 함박눈이 내렸다.
빨간 벽돌 옷을 입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의 한 골목. 나 60세 정청란이가 가진 다가구 주택도 이곳에 있다. 지금은 해가 막 퇴근할 시간, 가게 보고 있는 남편을 제외한 온 가족이 거실에 모였다. 모처럼 두 딸과 함께 술잔치를 벌여볼 생각이다. 뜨끈한 어묵탕 한 사발 끓일 생각으로 부엌에 들어가니 엄마는 소파에 누워 쉬라며 두 딸이 난리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거실로 쫓겨났다. 빨랫줄에 널린 건어물처럼 소파에 누워있자니 좀이 쑤신다. 5분도 안 돼서 벌떡 일어나 앉고 싶은 걸 보면 타고나길 통뼈에 잔병치레 하나 없이 우직하게 일만 할 팔자, 그런 건 벗어던질 수 없는 숙명이란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내가 지긋지긋했는데 지금은 좀 다르다.
요즘 첫째 딸 다정은 첫 작품 연재를 준비하기 위해 밤낮으로 담당직원과 통화하며 만화를 수정하고 있다. 둘째 딸 호정은 엊그제 공인노무사 3차 면접 합격 소식을 받았고 노무법인 수습을 앞두고 있다. 두 딸이 잘난 게 가장 크겠지만 그래도 평생을 열정 바쳐 일한 내 덕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쉴 새 없이 고기 떼다 손질하고 구워대던 지난날들이 값지게 느껴진다.
“엄마, 먹자!” 다정이 어묵탕 냄비를 들고 온다. 호정이 비빔밥 양푼을 들고 온다. 쯧쯧, 아직 인생 맛을 모르는 우리 딸들. 내가 친히 부엌으로 가 빨간 뚜껑 소주를 들고 온다. 돼지 엉덩이만 한 양푼에 숟가락 세 개가 바쁘게 움직인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켠 후 딸들에게 묻는다.
“그래서, 둘 다 독립은 언제 할 거냐?”
두 딸의 눈이 동시에 땡그래진다. 이내 표정이 장난스러워진 호정이 말한다. ”엄마아빠가 독립해야지. 이제 여기 언니랑 내 공동명의 되는 거 아냐? 둘 다 붙었잖아.“
그러자 다정이 호정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능글맞게 맞장구친다. ”뭐 아님 우리 집에 얹혀사시든지.“
“하이고, 돼지 방귀 뀌는 소리들 한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한 말인데 두 딸이 서로 눈을 맞추고 꺄르르 웃는다.
“세입자님들, 이제부터 돈 내세요, 돈!“ 나름 사무적인 말투로 말해본다. 두 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아, 못 알아들어? 이 집 내 거라고. 아무도 안 준다고!”
“에? 말이 다르잖아! 그것 때문에 우리가 무슨 고생을 했는데!“ 호정이 소리친다.
“너네 시집갈 때까지 꿈쩍도 안 할 거야. 말뚝박을 거야. 돼지 더 팔 거야!”
도대체 내 말의 어느 부분에 감동을 받은 건지 다정이 눈시울을 붉힌 채 웃으며 말했다. “결혼 안 할 건데. 여기서 평생 엄마아빠랑 호정이랑 살 건데.”
“어이쿠!” 다정이 내 품에 달려든다. 호정도 따라서 달려든다.
우당탕!
셋이 뒤엉켜 넘어지며 양푼이 뒤집어진다.
그친 줄 알았던 함박눈이 다시 내린다.
우리 집 앞 가로등이 동네를 따뜻하게 밝힌다.
이 못 말리는 두 딸들,
아무래도 좀 더 끼고 살아야겠다.
지금까지 ‘중간에서 만나자‘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맙습니다. 내일은 에필로그가 올라올 예정입니다.
그럼, 에필로그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