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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Dongyoon Dec 12. 2015

#2. 합리화

Posted by DONGYOON_HAN / 2015년 4월 여행 중

여행 배테랑 답지 않은 실수를 했다. 밀라노에서 시작해서 피사-친퀘테레-밀라노로 이어지는 기차표 예매를 자동화기기에서 하다가 중복 결제했다.  환불받고자 밀라노역 관리 센터에 가서 이탈리아 역무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탈리아 공무원 답게 그들은 여행자의 그 어떤 문제에도 초연하게 대처한다.  ‘Si, Si. 그런데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들. 약 5만 원가량의 돈, 배낭여행자에게는 하루 경비에 달하는 돈이었지만 아무리 닦달해도 움직일 리 없는 이탈리아 공무원들과 옥신각신 하느니 시간낭비, 감정 소비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바로 잊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잊어버렸다.

여행지에서는 당연히 앞에 사건과 같은 실수를 숱하게 하기 마련이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는 익숙지 않은 내 모습이 나오기 마련이고, 반대로 익숙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는 정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과소비, 시간 낭비가 이어지기 마련인데, 나는 주로 합리화를 통해 정신 승리를 이어갔다. 그리고 많은 여행자들 역시 합리화를 통해서 실수를 ‘퉁 치고’ 장기 여행을 이어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합리화라는 것은 이전에 받은 나의 크고 작은 혜택과 이득을 모아서 이번 실수로 이어진 마이너스를 메운다는 개념이다. 사실 사람이 간사한 것이 처음에는 내가 노력해서, 혹은 돈을 들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행운은 내 것이고, 내가 실수해서 혹은 내 잘못이 아닌데 발생한 손실에 대해서는 남 탓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기심에 대해서 너무 익숙하게 살아왔다.

여행 끝 무렵의 목적지 피사역


그런데 이것도 여러 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에이 뭐  지난주에 스페인 친구한테 술 얻어먹었는데 뭐 그 돈 이번에 냈다 셈 치자’라고 아주 자연스럽고 빠르게 생각이 정리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밀라노 기차표 사건 같은 경우는 1년에 가까운 정신 승리 덕분인지 ‘아 됐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돌이킬 수 없잖아, 이딸리아노들이랑 싸워 봐야 내 입만 아파’ 하고 무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40유로? 나 진짜  못났다. 40 유로면 식당 가서 제대로 된  식사할 수 있는데 그 돈을 날려? 진짜 멍청한  놈’이라고 자책하면서 기분이 나빠지고, 그러다 보면 여행하기 싫어지고, 내가 왜 여행을 하는가 그냥 집에 갈까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혹시나 동행자가 있다면, 이 더러운 기분이 자연스럽게 다툼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일상에서는 별 일 아닌데 실수한 사람은 괜히 더 미안해지고 피해 입은 사람은 대범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이 준 큰 교훈이다. 인간이 고민하는 것의 80%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라는 말도 있듯이, 여행도 마찬가지로 후회가 후회로 끝나는 일이 다반사다. 우리네 삶도 뭐가 다르겠나. 충실하고 보람된 하루가 있는 반면 실수와 좌절의 기간도 있는 것이니.


지금껏 살면서 합리화는 변명으로 치장된 정신승리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여행에서 배운 합리화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의 실수를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큰 방향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서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하면서 한 걸음씩 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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