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복은 운동할 때만 입는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작년 이맘때부터 실내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스타그램 피드를 도배한 지지 하디드와 켄달 제너의 건강한 몸매와 패션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타이트한 레깅스와 브라톱으로 은근슬쩍 복근을 드러내고, 스니커즈로 마무리한 이들의 스타일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막 걸어나온 듯 무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시크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레깅스와 브라톱만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순 없었다. 여긴 헐리우드가 아니니까. 낮은 자신감도 거들었다. 막상 레깅스를 입어보니 토실토실한 하체 라인이 그대로 드러났고, 엉덩이를 덮는 박스티를 걸치고 나서야 괜히 혼자 민망한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운동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애초 목표했던 11자 복근은 요원하지만 다른 곳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좋아하던 H라인 스커트와 포인티드 토 슈즈에 좀체 손이 가지 않고 뭉뚱한 스니커즈와 후디, 위트있는 프린트의 티셔츠가 예뻐보이기 시작한 것. 스포츠 브랜드의 데이웨어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몇 달 전에는 아디다스의 아노락을, 최근에는 파타고니아의 티셔츠를 장바구니에 넣기에 이르렀다. 라이프스타일과 패션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실감하는 가운데, 올해에는 취향의 변화가 더욱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 시즌 컬렉션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스포티즘은 패션의 단골 소재였지만 어디까지나 컬렉션의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컨셉 차원에 머물렀던 데 비해 이번 시즌에는 스포츠웨어와 데일리웨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언제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스포티즘, ‘애슬레져(Athleisure)’ 트렌드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지극히 포멀한 스트라이프 셔츠를 트레이닝 팬츠와 믹스매치하는가 하면, 아노락 점퍼와 H라인 스커트를 함께 입는 등 예전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생경한 조합들이 새삼 ‘쿨’하고 멋지게 다가왔다. 여기에는 몇 시즌 전부터 떠오른 고프코어(아웃도어 의류를 일상복과 함께 믹스매치하는 스타일링 방식)의 영향도 한몫 했다.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가 보여줬던 패딩 점퍼와 사이하이 부츠의 믹스매치, 등산복에서 볼 법한 원색적인 컬러로 물들었던 베트멍의 패션쇼, 산악 트래킹의 복장과 장비를 패셔너블하게 재해석하며 대드 코어에 방점을 찍었던 프라다의 런웨이를 통해 스포츠웨어에 충분히 익숙해진 것. 덕분에 이번 시즌부터는 브라톱과 레깅스를 고집하지 않아도 스포티즘의 건강미를 드러내는 다양한 스타일링이 가능해졌다.
오간자나 실크, 레이스 소재를 사용한 여성스러운 드레스에 투박한 스니커즈나 스포츠 샌들을 매치하고, 혹은 나일론 소재의 윈드 브레이커를 걸쳐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 온 것이다. 또 한가지 눈길을 끄는 지점은 서핑과 모터 스포츠, 산악 트래킹과 요가 등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스포츠 종목이 패션에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이미 몇 년 전부터 트렌드에 민감한 지인들은 여름마다 양양으로, 부산으로 서핑 여행을 떠나거나 SNS를 통해 자신의 운동하는 모습을 공유하곤 했다. 그사이 젊은 서퍼들이 즐겨 듣는 칠(Chill) 음악이 가장 트렌디한 장르 중 하나로 부상했고 인스타그램의 #헬스타그램 해시태그에는 약 3백만개의 게시물이 공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스포츠가 취미의 영역을 넘어 힙스터들의 놀이 문화로 자리매김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패션계에서는 애슬레져 스타일에 특화된 캡슐 컬렉션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론칭 직후부터 뜨거운 인기를 얻으며 꾸준히 새로운 라인업을 선보이고 있는 발렌티노의 VLTN, 타미힐피거X지지 하디드 컬렉션을 비롯해 토즈의 서핑 컬렉션, 샤넬의 윈터 스포츠 컬렉션인 코코네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렇게 패션계가 스포츠웨어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한편 스포츠 브랜드 역시 패셔너블한 감각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라프 시몬스, 고샤 루브친스키 등 동시대적인 디자이너들과 꾸준히 협업하고 있는 아디다스를 비롯해 리한나와 손을 잡고 펜티 푸마(Fenty x Puma)로 뉴욕 컬렉션에 데뷔한 푸마가 대표적이다. 이렇듯 하이 패션과 스포츠 브랜드가 애슬레져를 사이에 두고 점차 가까워 지고 있는 흐름 속에서 가장 쿨한 애티튜드는 운동복과 일상복을 나누지 않고 자유롭게 믹스매치하는 것 아닐까.
** 이 글은 <헤리티지 뮤인> 7월호에 실린 글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