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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Jul 08. 2019

판타지가 두근거리지 않는 이유

[바람의 열두 방향 - 어슐러 르 귄]

 

 나는 어렸을 때 신비롭고 호기심 가득한 장면들이 좋았다. 로봇이 변신하거나 용이 날아오르는 장면에 물리 법칙이나 생물학적 타당성 여부 검증은 필요치 않았다. 거창하게 용까지 갈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1미터 남짓의 피구왕 통키가 만화 속에서 땅에서 5미터 이상 뛰어올라 고무공 같은 피구공을 던지며 ‘불꽃슛’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내 호기심 더듬이들은 반짝거렸고 어린 꼬맹이의 두 동공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족 여행을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도 여행지에 대한 두근거림 보다는, DVD나 다시 보기 서비스가 전무했던 시절에, 빨간 염색머리의 피구 소년을 보지 못하는 서러움이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이곤 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우리는 ‘진짜 판타지’를 마주하고 있다. 현실과 사회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모든 믿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의 상황들이 소설보다 더욱 소설처럼 다가왔고, 생전 연고도 없는 트랜스포머와 간달프의 외침보다는 당장 내 앞에 놓인 시험 범위 교과서와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 질문 같은 것들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끊임없는 야근과 술자리를 반복하면서도 못돼 먹은 상사 밑에서 눈물에 욕이 마르지 않던 어느 27살 나이에 고혈압과 고지혈증 진단을 받아 병원을 다니던 친구가 있었고, 비트코인 열풍으로 하루에도 수억의 달콤한 꿈을 꾸다가도 6개월 만에 –98%라는 잔인한 평균 수익률 받아 본 지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열심히 유학을 다녀와 대기업에 다니며 늦은 나이에 결혼에 성공한 내 회사 동기는 퇴근길에 교통사고로 더 이상 두 딸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며, 그 와중에 어느 누군가는 별생각 없이 사둔 부동산이 몇 배로 올라 일명 대박 인생, 행복한 인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리모컨만 있으면, 마우스 하나만 있으면 이보다 더한 비극과 희극의 진짜 판타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힘을 잃고 재미가 없어질 수밖에. 읽는 내내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다소 흥미롭긴 하나 가슴 울림 없는 딴 세상 이야기. 비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또 비현실의 대환장 콜라보. 어설픈 가상(假想).



 판타지 문학은 캐릭터의 내면보다는 주위를 둘러싼 배경과 심지어 그가 걸치고 있는 스카프의 재질에 관심을 갖는다. 워딩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눈 앞은 화려한 무지개 빛 찬란함을 더해가는데, 동시에 깊어지는 공허함은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데도 채워질 줄을 모른다. 판타지 문학의 거장이 '개인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색을 유려하게', '인류학, 심리학, 철학, 페미니즘 다양한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나를 더욱더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만들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도, 손에 땀이 나지도 않았다. 하늘을 나는 말과 주문을 외는 마법사들의 신비로운 향연은 아쉽게도, 내가 마주했던 어제와 당장의 오늘, 그리고 내일의 현실들을 고민하는데 일말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백번 양보해 심리적 위로는 해주지 않았겠냐마는, 그 역시 내가 바라던 접근법은 아니었다. 인문학적 고찰이 시도하는 '정면 승부'보다는 회피와 환상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환각의 테라피이자 신비롭고 우아한 엑스터시로 그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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