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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Aug 19. 2019

어그로는 끌지 않겠다는 작가적 자존심


진부함과 창의성 사이의 간극에서, 보다 '작가 다움', '창작가 다움'은 후자에 무게가 실려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부하다'는 표현 자체가 창의성의 반대급부적인 성격, 즉 '창의적이지 않음' 또는 '창의적이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표현에 가까워 창의성의 반대어로는 적절치 않다. 이는 '전형성' 또는 '유형성'과 같은 표현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찾는다면, '정통성', '표준성' 혹은 '안정성'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이렇듯 (창)작가에게 기대되는 기본적 특질은 '새로운 무엇에 대한 창조'이다. 그럼 무엇을 새롭게 만들 것인가. 반대로, 새롭게 만들기만 하면 창작인가. 그 의미와 방향성에는 다양한 갈래들이 있겠지만, 그중에도 '수용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창작인가'가 주로 문제가 된다. 단순히 작가와 작품 그 자체의 사연과 태생에서 나아가, 그것이 수용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들을 전달하였는가, 궁극적으로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하는, 작가 - 작품 - 사회 - 수용자/소비자/관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이클 전체가 그 창작의 가치와 수준을 평가하는 시험대에 오른다.


물론 창작(물)의 경제적 가치가 늘 이러한 평가에 비례하여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자극적인 제목과 낚시성 기사로 높은 조회수를 받은 기자에서부터, 시대의 자극적 여론을 감지해 논란이 될만한 주제와 발언 등을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돈벌이에 이용하는 수많은 유튜버와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배경에서 수준 있는 역량과 많은 노력이 동원되어 작업된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수용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막을 내리는 영화나 연극, 노래, 문학작품들 또한 수도 없이 많다. 전자가 '악플도 관심이다', '노이즈 마케팅도 마케팅이니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식의 대단히 자본주의적인 발상에 근거해 끊임없이 저급한 '어그로(Aggro)'와 낚시(fishing)를 반복하는 동안, 후자의 '순진한' 창작가들은 통한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여기는 현실이다.






수많은 예술가가 대중 또는 돈으로 대변되는 권력과 타협하는 동안, 그것이 마치 당신의 본질이자 자존임을 자처하며 예술가로서 수준 낮은 어그로는 끌지 않겠다는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이들도 많다. 일부는 그 '청렴함'과 '순수함'을 늦게라도(심지어 죽은 이후) 보상받은 반면, 또 다른 일부는 인터넷 그 흔한 커뮤니티 게시글에도 언급되지 않는, on-line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둘을 평가하는 데에 큰 공감도, 개입도 하지 않은 채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나 또한 그것의 팔 할은 '운이고 타이밍이다'는 (이 또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선언에 근거해 무엇이 정답이고 당위인지,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상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대다수의 경우에 보류해왔다. 그러던 어느 오후, 나를 한순간에 작가로 만들어준 브런치의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이런 불구경이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닌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그로를 끄는 창작가가 될 것인가. 하물며 이 좁은 플랫폼 하나에서도 메인에 뜨고 주목받는 '몇몇'은, 당연하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제목과 콘텐츠들을 하나씩, 전장에 나가 베어온 적장의 목과 같이, 혹은 적토마와 그 보상으로 받은 훈장과 같이 대문에 걸어 놓고 있었다.


호기심 가지 않는 제목과 자극적이지 않은 콘텐츠로 사람들의 관심을 일으키고 조회수를 높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모순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창작가로서 그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창작을 시도하고 지향하고 싶다. 안다. 이미 이 글 또한 제목부터 어그로 투성이의 클리셰를 가득 머금고 있음에 나는 또 한 번 '순수 예술 창작'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적어도 글을 읽고 난 독자가 던지는 욕설과 비난들의 수준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창작가로서의 이 '어그로의 불가피함'을 조금이라도 설득할 수 있었다면, 그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으리라. 고로, 나는 순수한 창작가로 남을 수 있으리란 이기적 바람을 가지고.   


유행하는 공식과 자본주의의 힘, 디자인과 미사여구의 화려함, 여타의 타이밍적 운수(luck)를 빌리지 않고 독창적인 발상과 아이디어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유일무이 전무후무 창작가. 황량한 공터에 홀연히 나타나 종이와 펜 한 자루로 세상을 뒤흔드는, 불을 뿜는 용과 끝없는 우주를 그려내고 적절한 때에 타당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뜨거움과 냉정함을 불어넣는 고독한 무림의 고수. 수많은 현실의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외쳐야 하는 당신과 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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