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다소 맹목적인 감정.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감정들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대부분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운명론적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
특정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감정들은, 역설적으로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감정의 주체자의 욕망이 보다 중심이 되는 감정인 경우가 많다.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한 게 아니라, 나는 애초부터 -할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이 거기 마침 있었다는 등.
이 선후인과에 대한 착각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기에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의 방어기제가 적당히 버무려지면 생각보다 이 착오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또는 알아차리더라도, '그래도 내가 그 감정을 필요로 할 때 상대방이 거기 있었다는 것 자체가 운명적인 거 아닌가'하는 또 다른 방어기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라는 단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감정의 절대성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대적인 평가를 받기를 두려워한다. 상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이 마침 거기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도 우리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이 거기 없었더라도 나의 감정이 동일하게 발생하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소망.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가치가 시장 소비재와 같이 상대적으로 변하는 성격을 띠지 않고, 절대값을 갖는 무엇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런 환상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관계를 겨냥하고 있다는 진실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