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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yner Jul 01. 2021

미시하다기엔 너무나 거시해서

나는 삶이 너무 짜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올 때면

우주를 떠올리는 습관이 있다

'Pale Blue dot'

그가 떠올렸을 그날 그 상공을 생각한다



1.

어렸을 때 나는 장래희망으로

우주 비행사나 우주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8절지 스케치북에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가 실험 도구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아버지의 무언가를 잇는 연장선 상에서, 

똑같은 직업을 하겠다고 하는 건 좀 밋밋하니까,

살짝 비틀어서 좀 더 과학이 발전한 미래에

우주를 바라보는 무언가를 하겠노라고.

그게 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그럴듯한 포부를 나타내기에 적절한 대답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인과였다


비행기를 탈 때면 유독 잔상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낮이나 밤이나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 

내려다 보이는 지상의 모습들이다


비행기가 너무 높은 고도에 다다랐을 때 

흰 구름과 태양 그리고 파란 하늘이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도 꽤나 비현실적이지만

나는 그보다 

매일매일 보던 그 집과 차와 나무와 도로와 바다의 물결 같은 것들이,

현실이 비현실이 되는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과정이 좋았다

내가 알던 그곳이 맞나, 

내가 저 건물 안에서 보냈던 일과와, 

저 도로를 지나갈 때 보던 그 시야와

저 산을 오를 때 보았던 그 빼곡한 장면이

지금 내가 이 하늘에 올라서 보는 그것과 같은 것인가

나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짜 맞추고 다시 의심하기를 반복했다


내가 알던 미시들이 

거시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대체 저 안에서 뭘 했던 걸까'

   


2.

김초엽 작가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을 

자주 떠올릴 생각은 없었다


조금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SF에 단골로 등장하는

미지의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말 그대로 fiction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 책의 머리말이었나, 작품을 마치며 였나

작가의 소감이 인상에 남았던 거 같다


뭐 이런 소재로 글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해서 본 건데,

'가끔 우주를 바라보며 저 수많은 별들 속에 담겨 있을 이야기를 생각해요'

정도의 이야기가 있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한 맥락은 이런 거였다

내가 이 작가를 생각보다 자주 떠올렸던 이유였다 

일종의 동질감이었던 것 같다


책을 주제로 독서 모임의 발제를 하면서

유튜브에서 참고가 될만한 영상들을 찾았다

칼 세이건의 'Pale Blue dot'을 주제로 한 National Geographic의 다큐부터

원자부터 인류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를 비교해주는 영상,

NASA가 공개한 우주의 숨은 사진들을 모은 영상까지

정교하게 잘 짜인

'영화 같은 진짜'를 보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던가 벌리고 있었던가,

아무튼 대단한 충격이었다


Pale blue dot, 1994


3.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일주일씩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누가 어디가 더 좋냐고 물으면

나는 '신의 작품 vs 인간의 작품'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너무나 대단한 이탈리아였지만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너무나 미약했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나는 

그린델발트 뒷산에서 퓌르스트로 이어진 그 햇볕 가득했던 길과 

뮈렌의 눈 덮인 오두막집과 언덕 사이에서 앉아서 느꼈던 그 먹먹함과

마테호른의 미끄러운 간이역을 조심조심 내려오던 그 두근거리는 설렘을,

리기에서 내려다본 호수와 구름과 저 멀리 아른거리는 저 빛나는 산등성을 

결코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미사여구로 부연을 하면 할수록

엉망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4.

우리의 삶은

미시하다기에는 너무나 거시해서 

하루하루의 짜치고 구질구질한 삶의 굴곡과 단면들을

적당히 떨어져 바라보는 연습은 꽤나 유용하다


내가 지치고

누군가 누군가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고 

폭력을 가하거나 

시기하고 질투를 하고

욕심을 내고 

좌절을 하고 

집착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옥죄고

한없이 깊은 저 바닥으로 내리꽂으려고 할 때

또는 

완전한 선의에서 시작된 모든 열정과

치열한 노력들이 

나를 너무도 마이크로 한 미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할 때

나로 하여금 너무 지나치게 예민하고 강박을 갖도록 요구할 때

그러다 본질에서 벗어나 너무 멀리 가는 게 아닐까 염려의 마음이 들 때

나는 우주를 생각한다



우리가 떨어져 있었을지 모를 그 억겁의 거리와

불편하리만큼 정교한 우연 같은 필연들이 만들어낸

불가능에 가까운 그 모든 수치들과

그 시간과 그 시간과 

그 거리와 그 거리와

그 가능성과

그 불가능과

이 모든 잔인한 사실들이 만들어낸

거시의 황홀함 앞에서

나는 모든 미시들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나는 미시를 잊고 싶을 때 거시를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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