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반에 꼭 한 두 명씩 야구나 무용 같은 예체능으로 진로를 선택한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들었던 나의 어린 생각은 ‘저 아이들은 목표가 확실하니까 좋겠다’하는 거였다. 그때는 내 꿈이 무엇인지, 스무 살의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막막했던 시기라 이게 내 꿈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부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안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꿈의 문턱 앞에서 좌절하는 순간들이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실력이 없어서, 가정형편 때문에 혹은 부모의 기대 때문에. 영화 <야구소녀>는 그 좌절의 순간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두의 성장 이야기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냉소적으로 꿈을 포기하라거나, 막연하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어떠한 선택을 내리기 이전에 적어도 스스로에게 나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주려는 시도들이 필요함을 제안한다. 수인이가 그만두라고 다그치는 엄마에게 ‘내가 진짜로 잘하는 거면, 너무 억울하잖아’라고 하는 말처럼.
한 손에는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한 손에는 빨간색 글러브를.
그리고 공의 활주로를 꽉 부여잡는다.
공을 던지는 매 순간의 판단은 자신의 몫이지만 그 순간까지 든든하게 옆에서 지켜주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고맙다. 유달리 뛰어난 실력의 인물들은 이 곳에 한 사람도 없다. 각자의 실력이 있고, 그만큼의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조금씩 채워줄 수 있다. 프로로 가고자 했던 젊은 선수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한 진태이지만, 자신을 닮은 수인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지도를 통해 너클볼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정호는 오랜 시간 함께 연습해왔던 친구로서 끊임없이 동기 부여를 해주며 옆에서 발맞춰 달려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야구소녀>도 마찬가지다. 수인은 진태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프로 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다. 아마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수인에게는 지금부터가 더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실도 마찬가지다. 스크린을 비추는 빛을 거두어 극장을 밝힐 때 우리는 이제 막 무너뜨리기 시작한 편견의 벽을 생각한다. 사회에서 여성들이 서야 할 자리, 굳이 성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마주하는 각 세대 간의 갈등, 장애, 인종의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들 말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꿈 앞에서 기로에 서있는 자들이다. 어떤 선택을 내리기 이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주었는지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확신할 수 있다면, 그래서 바라던 꿈을 이루었다면 이 보다 좋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바라던 꿈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다.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나의 실패를 예단하지 않았으니. 연대의 힘을 믿는다. 하나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서로를 북돋아 미련없이 그 한계에 닿을 수 있게 하는 그 연대의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