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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Dec 17. 2020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독한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영화

오가는 길도 없는 그런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무슨 이유로 엮이게 되었을까.
출처: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에 대해 생각한다. 오로지 상부의 명령으로 그 잔혹한 일들을 수행했던 아이히만처럼 악랄한 행위들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또 그만큼 악의 씨앗은 생각보다 평범한 곳에서부터 자라나는 것이리라. 오늘 스쳐 지나간 그 인연에서, 혹은 어제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들에서, 그리고 믿음이 흔들리는 내일의 불안 속에서. 그래서 나는 신의 구원보다 매일 같이 언제 어디서고 나타날 수 있는 그 무수한 악의 근원들이 더 두려웁다.


사람들이 가장 절박할 때 의지하게 되는 혹은 집착하게 되는 믿음이란 비단 신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닐 것이다. 어떠한 신념이 될 수도 있고, 가치관이 될 수도 있다. 아빈에게 아버지 윌라드는 자기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때의 기억이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아빈에게는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남매처럼 같이 자란 레노라를 괴롭히는 남학생들을 찾아가 응수해주는 아빈. 아빈에게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삶의 철칙이 곧 그의 신념이었고, 가치관이었고, 신앙이었다.


영화는 아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지켜보자면 아빈의 신념은 꽤나 정의로운 방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앞으로 아빈의 인생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는 그 자신조차도 알 수 없다. 악을 처단하는 것 역시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므로 그 숱한 싸움 속에서 미처 보듬어주지 못한 사연들은 또다시 광기 어린 신념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신에 대한 과도한 맹신으로 결국 아내를 제 손으로 죽이고 말았던 로이, 감히 신에 근접한 권력을 남용해 약한 사람들을 이용했던 프레스턴, 살인을 통해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쾌락에 사로잡혔던 칼, 그리고 아내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키우던 개를 죽이는 희생을 자처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목숨을 끊었던 윌라드. 믿음을 가지는 것은 죄가 되지 않으나 그 믿음으로 타인을 희생시킨다면 이보다 무서운 건 이 세상에 없다. 타인을 해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도 점점 망가진다. 그렇게 괴물이 되어 간다.


나도 한때 운명이란 것에 예민하게 의식한 적이 있었다. 미신이나 비현실적인 힘에 의지하게 되고 유난히 밤하늘에 기도를 많이 했던 날들이었다. 어쩌면 그 당시가 나에게 가장 힘이 들었던 순간이었던 것도 같다. 신의 계시가 아닐까 제멋대로 해석해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었다. 나의 믿음은 나의 현실을 제대로 보기가 두려워서 찾아낸 일종의 도피처였다. 그러나 그 도피처에 숨어 있을수록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견디기 힘든 상처도 받아들일 줄 알고 잊고 싶지 않은 인연도 떠나보낼 줄 알아야 했다. 완벽하지 않고 여전히 연약한 나를 단단하게 가꾸는 시간들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 영화 속의 이야기는 오하이오와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인접한 두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곳곳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소식들은 이 복잡한 관계의 인연들이 이 좁은 세상 속에 국한된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빈은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루거를 손에 쥐고 네 명의 목숨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아빈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죽음들은 그저 마땅한 목숨 값이었을까. 권위적인 신분을 가지고 파렴치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긴 프레스턴, 비정상적인 기록들을 남기며 연쇄살인을 저질렀던 칼과 샌디, 그리고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하여 불리한 소문의 근원은 살인을 저질러서 라도 없애버릴 수 있는 보안관 리. 우연히도 그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손에 쥐었던 바로 그 루거는 (농담 삼아 언급되기는 했지만) 히틀러가 자살할 때 쓰던 총이라 한다. 나치가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의 중심에 서 있던 히틀러의 목숨을 앗아간 그 루거로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저격한다는 설정은 우연치고는 아이러니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름하야 악마의 소행을 소탕하기 위한 정당한 명분이 있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이 나고 히틀러가 이 세상에 사라져도 악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빈이 마주한 세상이 그러했듯이. 만약 아빈이 그들을 그때 죽이지 않았더라면 아빈이 먼저 죽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 이후에도 수많은 피해자들이 그들의 악행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아빈의 살인에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워질까. 확신할 수 없다. 또다시 시작되는 전쟁의 기운. 그리고 하루 만에 그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서 나른한 졸음에 빠져드는 아빈의 모습. 아빈이 잠에서 깨고 나면 그의 앞에는 어떤 모습들이 펼쳐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삶이란 게 약간의 희망과 약간의 불안을 안고 확신할 수 없는 차에 올라타 내 운명을 시험하는 것만 같다. 계속해서 악마와 싸우면서, 그리고 나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에 악마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하여 이 세상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일생의 연쇄살인의 파트너를 만나는 순간, 한쪽에서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 식당에 한 남자가 난동을 피우려 하자 샬롯은 남몰래 선행을 베풀었다. 화재로 집과 부모를 모두 잃은 헬렌에게 관심과 연민을 쏟았던 윌라드의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한밤중에 불쌍한 아빈의 곁을 지켜준 마을 할아버지가 있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용서해줄 자신은 있었던 레노라의 착한 마음이 있었다. 이와 같은 마음들이 타인에게도 조금씩 영향을 미친다면, 그래도 몇몇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어두운 이야기들 사이에서 사라지기에는 여전히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이 세상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보이지 않는 열망과 미련한 집착으로 헛된 희망과 실망의 반복 속에서 눈 앞에 있는 소중한 행복들을 놓치며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차라리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세상의 일면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량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그게 악마가 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을 살아갈 유일한 이유가 된다.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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