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런 영화

<콜럼버스>

세상 모든 비대칭적 존재들을 온 맘으로 안아주는 영화

by FREESIA
모든 게 엉망인 그 순간, 평생을 지낸 이 곳이 갑자기 달라 보였어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요.
출처: 영화 <콜럼버스>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라 불리는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있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 여느 건물처럼 답답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유를 보여주는 이곳의 건축물들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사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그런 건축물에 별로 관심이 없다.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바로 건물인데도 유독 이 콜럼버스 도시의 건축물을 한번 더 보게 되는 데에는 역사적인 가치와 더불어 익숙함에 가려 보지 못했던 곧게 뻗은 선의 아름다움과 창을 타고 흐르는 빛, 그리고 모든 것을 품어줄 것만 같은 공간성을 화면에 잘 담아낸 덕일 것이다. 특히 코고나다 감독이 보여주는 정적인 분위기 그리고 대칭과 비대칭을 아우르면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는 구도는 고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연출 감각이다. 더불어 진과 케이시의 이야기를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서 각 장면과 그 분위기에 한껏 매료되어 조화로움까지 보여준다. 이렇게 콜럼버스의 건축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처럼 내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에게 구조적으로 깨달음을 주는 듯하다.

출처: 영화 <콜럼버스>

웃는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케이시와 한국말이 조금 서툴러서 귀여운 진.

완벽하지 않고 남몰래 마음속 깊이 내려앉은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던 이 두 사람은 콜럼버스에서 만난다. 두 사람을 가르던 울타리의 경계를 벗어나 둘을 이어주는 문 앞까지 다다르며 그 둘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케이시가 진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건물을 하나씩 설명해주면서 우리도 그들을 따라가고 그 건축물들을 통해 조금씩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출처: 영화 <콜럼버스>

초반부에 등장하는 엘리엘 사리넨의 퍼스트 크리스천 교회를 통해 케이시는 비대칭 속에 균형이 있음을 말한다. 흔히 우리는 대칭이어야만 곧 균형적이라 생각하지만 이 건축물이 보여주듯이 비대칭에도 균형의 아름다움은 분명 존재한다. 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구도에서도 엿볼 수 있는 미학이다. 매번 대칭뿐 아니라 비대칭 구조에서 보이는 평온하고도 아름다운 화면 구성을 통해 이 영화는 거대한 담론을 제시한다.

출처: 영화 <콜럼버스>

그녀가 세 번째로 좋아하는 건물인 어윈 컨퍼런스 센에서는 진이 그녀에게 왜 이 건축물이 좋은지에 대해 묻는다. 이때 온갖 역사적인 설명을 더해서 이유를 설명하던 케이시는 진의 조언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누구를 설득시킬 이유가 필요하지 않음을, 그저 그것이 주는 느낌이 좋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후에 케이시가 콜럼버스를 떠날 결심을 하는 계기 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 같다.

출처: 영화 <콜럼버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진이 아버지의 건축 노트를 참고해 설명하는 제임스 폴셱의 지역 병원 정신과 병동. 이 건축물을 통해 우리는 건축이 갖는 치유의 힘을 실감하게 되고, 그 순간 케이시와 진의 대화 속에 제 3자로서 건축물 또한 함께 교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리도 건축물은 우리에게 치유가 되고, 위안이 될까.


케이시는 어머니가 어릴 적 마약을 한 탓에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고, 관계에 치여 힘들어하는 엄마의 곁을 지키기 위해 대학 진학을 미루고 있는 상태다. 진은 무정함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다. 종교를 군주국에 묘사할 때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시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그는 멀리 한국에 일을 하면서도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이런 두 사람처럼 우리의 삶은, 또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대칭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 비대칭적인 상황이 때론 우리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 때가 있다.


차라리 이 곳에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던 아버지와의 관계.

엄마를 떠나 자신의 꿈을 향해 다가가는 것.

세상에 모든 것은 완전하지 않다. 조금씩 안 맞는 부분을 가지고 가는 것.

그 불완전함과 불안함을 안고 가는 우리네의 모습이 비록 비대칭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곧 아름다운 균형이니 방황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라는 것이 바로 이 곳에서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건축물들의 함의가 아닐까.

사리넨의 디자인은 비대칭 속에 균형이 있어요.
출처: 영화 <콜럼버스>

진이 아버지가 노트에 적어 놓은 건축물이 이게 아닐까 하고 보았던 시청 건물에는 양쪽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벽이 채 맞닿지 못하고 조금 벌어져 있다. 이 건축물의 모습은 서로를 통해 위안이 되고 용기를 얻었던 케이시와 진의 모습을 대변한다. 초반부 가브리엘은 도서관 책에서 발견한 낙서에 대해서 연구한 바를 설명한다. 독서와 게임을 사이에한 부자(父子)의 집중과 관심의 차이에 대해 논한 누군가의 글처럼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때에 고정된 관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과 내가 다르다는 사실은 '관심'의 차이에서 비롯한다는 것. 즉, 그 사람의 어떠한 행동의 가치는 이렇다 저렇다, 올바르다 그르다 식으로 평해질 수 없고 각자의 관심이 어디에 놓여있는 가가 차이를 만들어내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해진 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똑같이 동등한 위치에 속하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출처: 영화 <콜럼버스>

진은 매번 걸려오는 한국 직장에서의 전화로 골머리를 앓고, 케이시는 만나는 지인들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걱정스러운 투로 건네는 말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진과 케이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리에서 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로 다투던 때에 그들은 각자의 관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아서 읽었던 아버지의 건축 노트가 건네는 말처럼 '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에 대한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와 의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렇게 그들의 서툰 마음은 건축물과의 교감으로 한 발짝 더 성장한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진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세상을 바라보던 그 자리, 그곳에 똑같이 서서 그를 조금씩 받아들였다. 케이시는 어머니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자 엄마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그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해 머릿속을 복잡해졌다. (사실 엄마가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했던 건 관계에 상처와 외로움이 큰 그녀이지만 자기 때문에 꿈을 망설이는 딸의 앞에서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진은 이제서야 막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케이시도 비록 콜럼버스를 떠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때의 어머니의 맘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케이시에게 고민이 되는 일을 농담 삼아 건드린 가브리엘은 후에 그녀가 건네는 좋아하지도 않는 담배를 따라 피웠다. 진은 이미 둘러보았던 밀러 하우스를 케이시와 다시 함께 와서 그녀가 설명해주는 것들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들이 케이시를 대하는 행동에는 멀리서 그녀가 하는 것들을 그저 여유를 두고 지켜보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시청 건물의 벽이 하나로 연결되지 않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는 너고, 너는 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너는 너 그 자체임을 인정하는 것. 그렇게 스스로에게도, 주변 관계에서도 불완전했던 이들이 건축물 벽 사이 '틈' 만큼의 공간을 두고 서로를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그 '틈'이 필요한 것이다. 그 작은 공간이 자유고 희망이고 빛이다.

출처: 영화 <콜럼버스>

처음과 끝.

콜럼버스란 곳에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이곳을 떠나고 싶은 한 남자. 그리고 늘 이곳에 살아와서 그 익숙함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한 여자는 스튜어트 브릿지를 통해 콜럼버스를 오고 갔다. 마지막 작별 인사 때 진과 케이시가 나눈 포옹은 서로에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라며 위로를 건네주는 든든한 품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그들의 인연과 늘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하고 있는 건축물과의 소통을 통해 우리는 관계의 '이해'를 실감하며 한 걸음 새로운 곳으로 향할 용기를 얻는다.


어느 날, 또래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서 놀고 있던 꼬마 아이를 케이시는 본 적이 있다. 외로이 떨어져 있던 그 아이가 이내 자기 친구들을 뒤따라 간 것처럼

시작 앞에서 남들보다 조금은 느렸지만,

그래서 아직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케이시는 그녀의 길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방황의 끝에서도 끊임없이 용기를 내어 다시 삶을 살아간다.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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