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런 영화

<버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때를 그리는 영화

by FREESIA
저는 뭐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출처: 영화 <버닝>

안개 낀 새벽.

흐릿한 차창.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불안한 삶을 수많은 메타포의 향연으로 위로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숱한 꿈과 희망에 대하여 있으리라 믿거나 상상하지 못하고 차라리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이 고루한 현실을 버텨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미가 말한 것처럼 리틀 헝거는 그저 육체적 굶주림을 말한다면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굶주림을 의미한다. 해미가 벤의 모임에서 보여주었던 춤처럼 리틀 헝거가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가는 순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감격에 차오른다. 저녁부터 시작하는 리틀 헝거가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가듯 이는 해미와 종수의 모습을 너무나 닮아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 없이 알바비로 겨우 생활을 꾸려가는 그들이 삶을 회의하는 모습, 그리고 세상에 맞서 자존심만은 잃지 않겠다며 자신의 삶을 고집하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말이다.


뉴스에서는 연신 청년실업 문제로 이슈가 되고 있고, 이주민들은 이 땅에서 사람 대접 받지 못하며 여전히 여자들을 위한 나라가 되지 못하는 이 세상. 이것이 누군가가 그토록 말하던 청춘이었던가.

여기서 베이스가 느껴져요. 뼛 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출처: 영화 <버닝>

나의 이름 대신 그들에게는 그저 '3번'이란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그리고 벤의 집에서 빠져나온 해미의 고양이를 찾기 위해 그들은 '고양아' 혹은 '야옹아'라고 부를 뿐이었다. 하지만 종수가 아무리 찾고자 해도 여태껏 보이지 않던 그 고양이를 '보일아'라고 이름 불러주자 그에게 다가온 것처럼 '3번'이라 불리고 또 그렇게 불렸을 종수가 해미로부터 '종수야, 이종수'란 말로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는 다시금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던 듯하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업자, 내 아이의 아버지 혹은 아들,딸과 같은 무거운 이름 대신 온전히 제 이름으로 불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 음울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깨워준 해미를 찾는 것은, 그리고 자신을 닮은 고양이와 우물, 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찾는 것은 결국에는 '이종수'라는 이름의 존재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성형을 해서 얼굴이 많이 달라진 해미와 곧잘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고양이, 엇갈리는 증언의 우물 그리고 불에 타지 않았는데 불태웠졌다는 비닐하우스. 보일 듯하면서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것 같기도 한 이 모호함은 의문만이 가득하고 답은 없는 이 허무한 세상이자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해미, 종수와는 달리 미스터리한 남자, 벤은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있다고 믿고 눈 앞에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돌을 눈 앞에 돌로 보여내는 사람이고, 신과 같은 자신에게 음식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이자 재미를 위해서라면 범법행위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넓은 집과 좋은 차에 화목한 가족과 친구가 있는 그 사람은 종수의 눈에 개츠비 같다. 모든 것을, 보이지 않는 것도 눈 앞에 둘 수 있는 그 사람과는 달리 종수와 해미와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답을 찾아 정처없이 헤맬 뿐이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가슴이 뛸 수 있을까.

여기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
출처: 영화 <버닝>

종수가 이전에 살던 데보다 훨씬 살만하다며 들어온 해미의 좁디 좁은 자취방. 북향이라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온전한 있는 그대로의 햇빛도 아니고 다른 건물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햇빛이 들어올 뿐이다. 하지만 해미가 진실을 말해보라며 종수에게 말한 뒤 이어지는 섹스 도중, 종수는 벽에 비치던 순간의 빛 조각을 발견한다. 그에게 그 순간의 빛은 희망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났던 날 아버지는 종수에게 어머니의 옷을 태우라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엄마의 빈자리를 잊어버리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빈자리를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살아왔던 종수가토록 해미와 고양이와 우물과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녔던 건 부존재를 존재로 만들고 싶은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작은 빛에 이끌려 존재를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그래서 저 붉은 노을처럼 한 순간 불타오르지만 이내 보랏빛이 되고 어둠으로 사그라든다. 이처럼 타오를 듯하면서도 식어버리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이자 청춘이었다.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출처: 영화 <버닝>

해미가 아프리카 관광지 중 찾아갔던 곳은 막상 가보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쓰레기만 가득 쌓인 주차장. 그리고 그곳에서 혼자 남겨진 자신을 자각하며 괜스레 서글퍼졌다고 한다. 그렇다. 남들을 따라 결국 그곳에 다다르지만 막상 아무것도 없었던 현실의 끝. 그곳에서는 몸뚱이밖에 없는 '나'만을 발견하는 것이다. 해미에게 왜 자꾸 창녀처럼 옷을 벗느냐며 나무라던 종수. 그도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벤의 흔적들을 불태우고 자신의 모든 옷가지를 함께 태워버린다.


그는 모든 희미한 의미들의 존재를 원했던 잠깐의 불타오르는 열망을 불속에 집어삼키고,

다시 흐릿한 차창에 가리워져 불에서 차츰 멀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긴 이야기는 정해진 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이 영화가 그토록 희미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건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종수가 되어보게끔 하는 것일테다. 어느 것이 맞는지 분명하지 않은 수수께끼같은 이 세상 속에서 답을 내려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해미가 진실을 이야기 해보라고 말했던 것 처럼

벤이 '물어봐도 괜찮냐'고 앞서 질문했던 것처럼

사실 궁극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 공허한 세상을 바라볼 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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