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런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시간의 힘을 가장 잘 설명하는 영화

by FREESIA
세상이 나에게 가르쳐준 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출처: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와인에도, 우리의 삶에도 시간은 분명 필요하다.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맘을 이해하기 위해서. 장은 맏아들로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그런 아버지와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떠나는 이유가 있다면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이유도 있는 법.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다. 10만에 재회한 남매가 잠깐의 여유도 없이 마주해야 했던 건 그들에게 남겨진 와이너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였다. 그렇다고 하여 장, 줄리엣, 제레미 이 세 남매가 그려나가는 여정이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현실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 간간히 재미있는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가끔은 머리 복잡한 문제들로 들쑤시지만 그래도 함께 하는 소중한 이들이 있기에 미소 지을 수 있는 게 바로 우리의 삶이란 사실을 느끼게 한다. 이를 테면,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는 장을 위로해주기 위해 처가에 가기로 한 약속을 져버리고 하루를 지새웠던 제레미의 에피소드라던가, 줄리엣이 멀리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장면을 장과 제레미가 지켜보며 그들의 대화 말을 상상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은 별다른 게 없는데도 괜히 재미있고, 기분이 좋아지는 씬들이었다. 이외에도 신나는 배경음악과 함께 그들이 본격적으로 와이너리를 운영하면서 포도를 수확하고 업무를 분담하는 일상의 모습들도 무척 흥미로웠다.

출처: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화기애애하고 사랑스러운 장면들과 더불어 이 영화가 아름다운 점은 구조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시간의 흐름과 힘을 자유롭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선, 초반부 장이 창문 밖으로 바라본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와이너리의 풍경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어릴 적 장은 매일 아침 조금씩 변화하는 풍경을 보며 자신의 삶도 매일이 새로울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보니 세상은 잘 변하지 않으며, 그의 삶도 그 풍경을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그가 어릴 적 느꼈던 시간과 후에 느꼈던 시간의 느낌은 모두 틀린 것이 아니다. 매일 똑같은 날이 없다는 것이 바로 시간이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일 테고, 또 사계절이 늘 반복하듯 그 자리에 또다시 머물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 또한 시간의 단면일 것이다.


모든 순간에 새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견고해지는 맛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의 힘이다.

출처: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인상 깊은 장면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남매의 모습이었다. 장을 중심으로 줄리엣과 제레미가 양쪽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감각적으로 묘사되는데 이 장면이 어쩌면 장이 세 남매 사이에서 져야 했던 책임의 무거움을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 곳곳에서 가끔은 빠르게 흘러가는 사계절을 보여주다가도 가끔은 그 시간을 잡아끌며 그들의 굴곡진 관계를 설명해주기도 하는 시간의 흐름과 장이 아내와 긴 시간을 들여 오해를 풀어가는 장면 혹은 세 남매가 아버지의 유산 문제로 논의하는 장면에서처럼 중간 몇몇 부분을 과감히 생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시간의 구성 방법은 말 그대로 시간을 갖고 노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연하다. 때로는 길게 느껴지고, 어떨 때는 너무 짧게 느껴지기도 하는 그 시간의 여러 단면을 이 영화의 다양한 연출 방식으로 재미있고, 감각적이게 또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연출 뿐만 아니라 세 남매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시간의 힘은 증명된다. 제레미는 처가의 압박 속에서 꽤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그런 그가 후반부에는 자신의 생각을 장인어른에게 열변을 다해 토해내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이 와인을 시음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듯 각자에게는 취향이 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건 영화는 제레미가 처한 상황을 통해 내 취향을 공격하는 다른 누군가의 취향을 도리어 나무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임을 인정하는 이상적이고 착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다는 방식으론 성립할 수 없다. 잘 들어맞지 않는 것들은 오직 시간의 힘으로 그 모난 부분들이 허물어지고 잘 맞아 들어져 가길 기다려야만 한다.


제레미의 방식과 장인어른의 방식 중 어느 하나가 틀린 게 아니듯이.

장과 아버지 사이에서 잘못된 사람 하나 없듯이.

부르고뉴를 사랑한다고 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나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듯이.

출처: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줄리엣 또한 와이너리를 운영하며 오랜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불안해했었다. 누구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변하는 순간에는 스스로의 확신 앞에서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장의 조언처럼 이제는 스스로의 마음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맛을 향해 모험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인 것이다.


장은 줄리엣에게 아버지가 아닌 너의 선택을 따르라며 조언하지만 정작 그도 그의 선택 앞에서는 수 없이 불안해했다. 매번 전화로 닿지 않는 말들을 이어나가며 힘들어했고,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만난 순간에도 '이제 우리 함께 하는 거야?'라며 그녀에게서 답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장에게 물어본다. 그렇다. 장도 사실은 스스로가 답을 내리길 회피하고 먼 곳에서 그 답을 찾으려 헤맸던 것이다. 그가 답을 찾아 세상을 보려 했지만 막상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볼 수 없단 사실만을 안고 돌아왔을 뿐.


때론 멀리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곳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답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건 시간이다.

출처: 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처음에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부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시간들이 오히려 우리의 관계를 와인처럼 숙성시키고, 그 사랑을 더욱 오래 떠올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조상들이 남겨놓은 와인을 맛보며 그들을 떠올리듯이 말이다.


싱그럽고 따뜻한 영화다.

줄리엣과 제레미 그리고 장이 함께 그 무거운 기계를 한 방향으로 밀어내던 모습,

이젠 오빠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말,

서로의 눈물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옆에 있어주려 하는 그 마음처럼

오랜 시간을 뒤에 두었을 때 우리의 사랑은 더욱 소중해지고 견고해진다.


평점: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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