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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SIA Aug 02. 2019

<자비로운 날들>

상처를 치유하는 세 번째 길을 제시하는 영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출처: 영화 <자비로운 날들>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이처럼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집안의 가족으로 몰아두고, 'Mercy'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사실은 사형제도를 찬성하고 있는 상황으로 두며 서로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모순들을 한 곳에 모아두면서 우리가 여태껏 갖고 있었던 모든 관념이나 상식에 도전하고자 한다. 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는 영화를 처음 접해봐서 새로운 느낌도 있었다. 다만, 루시가 처해있는 상황은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논쟁이 되는 상황들에 갖다 대기에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인 것은 맞다. 가해자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어 있고, 게다가 아버지에게는 무죄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어서 범죄자로 몰려있는 상황이 함께 겹쳐있다. 따라서 모든 경우에 대조해볼 수는 없는 단편적인 경우를 보여주고 있어 조금 더 본질적인 사형제에 대한 논의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영화는 사형제뿐만 아니라 데모 현장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퀴어라는 소재도 함께 끌고 온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사랑스럽고 엉뚱한 행동들이나 남매간의 말다툼 속에서의 소소한 재미 덕에 영화의 핵심적인 이야기가 마냥 무겁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여기서 하필 퀴어가 들어왔을까. 루시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동창은 그녀를 변태라고 부를 만큼 여전히 사회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이 여전히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느냐, 아니면 자비를 베푸느냐가 우리 손에서 결정되는 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이 두 여자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느낌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다.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논하는 이 문제를 앞에 두고서는 우리 주위에서 만나게 되는 숱한 갈등들이 얼마나 소모적인 싸움으로 느껴지는가 생각하게 되는 면도 있다. 이렇게 영화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으려 하다 보니 솔직히 중반부까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그 맥락을 잡기가 힘들지만 마지막을 향해 나아갈수록 모든 문제가 맞물리면서 그 갈피를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영화 <자비로운 날들>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4개월 뒤 아버지의 사형을 앞두고 중간에 시간이 한꺼번에 점프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사형수들의 죄목과 마지막으로 한 식사를 보여준다. 어떤 이는 피자와 콜라, 어떤 이는 맥앤치즈. 사형수라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있고 때론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일 만큼 잔인했던 이들의 마지막 식사는 너무나 평범했다. 죽음 앞에서는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무력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매일 같이 데모에 나가는 루시 가족의 삶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사형수들보다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남겨진 이들의 상처에 주목하고자 한다. 막내는 서로가 매일 같이 싸우는 일들이 조금은 불안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집에 개를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루시가 머시를 집에 데려와 말해 주었듯, 살인사건이 일어난 그 날의 어머니의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보이지 않도록 TV로 가려놓은 것처럼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고, 계속해서 맘 속 깊은 곳에 흉터로 남은 고통이 그들에게 있다.

출처: 영화 <자비로운 날들>

사실 루시는 직접 두 눈으로 쓰러진 어머니의 현장을 목격했다. 하지만 루시의 언니는 그런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 제3의 용의자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 언니를 따라 루시도 아버지가 가해자가 아닐 것이라 믿기로 했다. 하지만 절망적 이게도 모든 결정적인 증거들이 아버지가 한 일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도 완전히 아버지가 무고하다고만 생각하진 않았다. 변호사가 무죄로 입증할 만한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그녀는 내심 안도한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도 이 모든 상황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루시는 아버지의 사형 집행 때 양쪽에 있는 언니와 머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여태껏 죄를 외면하고 싶은 입장과 그럼에도 죄는 분명 처벌되어야 한다는 입장 사이의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꿋꿋하게 버티던 힘이 이내 무너져 내린다. 13살부터 약 10년간 지켜봐 온 일들이기에 그녀를 너무 힘들게 한 긴 시간들이었고, 자신을 도와달라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분명 있었을 테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고, 그로 인한 슬픔도 억누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루시의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물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그에 타당한 엄중한 처벌이 내려져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은근히 내포하는 설정들, 이를 테면 정신지체 장애자가 살해를 하여 사형되는 상황, 루시의 아버지처럼 증거 부족과 같이 사형을 내리기엔 조금은 위험한 상황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형제의 옳고 그름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단, 이 논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중대한 이슈인 건 사실이지만 이를 떠나서 이 상황에 직접 맞닿아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취지이다. 데모 현장에서 너는 너, 나는 나 식으로 서로 맞서는 상황, 머시네 집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너는 반대편이냐'로 서로 편 가르기 하듯이 구분하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그 이분법적인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에서는 사형제의 찬성과 반대하는 양측 입장이 아닌 제3의 길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남겨진 자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그 분노로 또 다른 상처를 입히기보다는 세상 앞에 무력한 인간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서로 위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루시와 머시의 만남처럼 말이다. 반대편에 위치하지만 그 아픔에 공감하고 루시를 진심으로 돕고자 했던 머시와 그로 인해 루시가 느꼈던 행복처럼 세상에는 경계의 모호함도 필요하다. 

출처: 영화 <자비로운 날들>

영화의 원제는 <My days of Mercy>라고 한다. 루시는 머시를 만나고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했기에 그녀의 이야기는 '머시와 함께 한 날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진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버지를 믿고, 그에 대해 스스로 자비를 베풀고자 노력했던 루시의 긴 시간들을 명명하는 제목일 수도 있다. 더불어 사형제도의 찬성과 반대라는 논리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진정한 의미의 자비를 배운 그녀들의 이야기를 가리키는 의미도 담고 있을 것이다. 자비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내리는, 한 사람의 특권이 아니다. 상처를 안고 있는 자들이 경계하지 않고 상대에게 먼저 다가가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다시 용기 내어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나누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비다. 


평점: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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