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초월하여야만 이해되는 삶의 맥락을 그리는 영화
난 시그리드로 남고 싶어요.
각자의 선택의 실마리로 구축되는 우리 삶에서 나도, 그대도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게 있다면 시간일테다. 놓쳐버린 시간은 다시 돌릴 수 없고, 황혼의 시간 위에서 잠들 수도 없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우리도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시간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쉽게 떨쳐버릴 순 없다. 누군가는 예전 같지 않은 체력과 노화로 건강에 신경 쓰거나 의학적인 기술에 힘을 빌리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내가 왕년에'라는 말로 인생의 전성기를 추억한다. 그리고 불문율처럼 정해진 나이대에 따른 적령기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회로부터 소외된 것만 같은 불안함에 압도되어 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늙어감에 대해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여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또한 주인공 마리아가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했던 한 연극의 속편에 캐스팅되면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젊음에 대한 욕망과 다시는 그 시절로 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한 인간의 한계를 통찰력 있게 다루고 있다. 독특하게도 영화 자체는 1부, 2부, 에필로그로 구성되고, 페이드아웃으로 각 신을 연결하는 등의 연극적인 요소를 끌고 들어왔다. 특히 연극 대사를 연습하는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의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연기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 장면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글은 물체와도 같아서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니까요.
연극의 결말은 마리아가 연기하는 헬레나가 홀연히 사라지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와 발렌틴은 그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물론, 사라졌다고 하니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발렌틴의 말처럼 새로운 시작을 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라졌다'라는 똑같은 문장을 보고 각자는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이와 비슷한 이치는 앞서 마리아와 발렌틴이 대사 연습을 하는 씬에서도 볼 수 있다. 연극의 한 대사로 마리아는 이런 대사를 한다. '욕망이란 단어가 나올 줄도 몰랐어. 어쩔 수 없이 네가 전과는 다르게 보여.' 연극의 한 대사일 뿐인지, 진짜 마리아의 진심이 담긴 말인지 분간이 안 되는 씬에서 이런 대사가 등장함으로써 두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방향을 틀었다. 두 사람 사이의 남모를 애틋한 감정이 있을 수 있다는 분위기를 단지 '욕망'이라는 한 단어로부터 자아낸다.
더 나아가 마리아는 젊은 비서 역인 시그리드 역을 맡았던 과거와 달리 시간이 흐른 뒤 속편에서는 시그리드를 상대했던 나이 든 상사 헬레나 역을 맡고서 도무지 그 캐릭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마음속에는 젊고 아름다웠던 시그리드였던 마리아로 남고 싶은데 그녀는 헬레나 역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그리드 역의 조앤을 보면서 그녀의 당돌함, 남 눈치 보지 않는 젊음과 새로움에 왠지 모르게 스스로를 비교한다. 오히려 헬레나가 자신의 고통을 다 드러낼 줄 아는 솔직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피력하는 발렌틴의 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던 마리아가 유부남인 유명 작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조앤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연극을 한 발치 떨어져서 지켜보는 입장이 된다. 자신의 연극을 준비하던 마리아가 자꾸만 젊은 조앤에 대해서 검색해보고 이미지를 찾아보던 때와 달리 이제는 그 불륜으로 상처 입어 자살기도를 한 작가의 아내를 검색해본다. 자신의 상처를 다 드러내고 파멸해버리고 마는 헬레나라는 캐릭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다.
클라우스 감독 또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거라고. 자신의 상황에 집착하기만 하면 그 이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관객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음에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은 텍스트로 점철되어 있다. '욕망'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야기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고, 초반부 오로지 바로 앞에 통화하고 있는 인물들의 말과 표정으로만 모든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만큼 우리가 마주하는 텍스트는 정말 가변적이며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뒤로한 한 가지 단면일 뿐이다. 말로야 스네이크가 산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게 희미하다. 그런 텍스트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나도 상대도, 그걸 지켜보고 있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구름에 가려진 텍스트를 보며 우리는 그 맥락을 상상할 뿐이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죠. 나이가 없어요. 동시에 모든 나이대를 대변하기도 하고요.
조앤과의 첫 미팅에서 조앤과 그녀의 애인은 마리아에게 잘 보이려 좋은 말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러던 중 조앤의 애인은 마리아의 이 말이 감명 깊었다고 한다.
배우의 인생에 있어서 후회는 금물이다.
그 말을 듣고선 마리아는 놀라며 묻는다.
'제가 그랬나요?'
가끔은 우리는 스스로가 너무 많이 변해서 지난날 나의 흔적들을 무심코 발견하게 되었을 때 새삼 놀라곤 한다. 마리아에겐 각별한 존재인 감독 또한 그의 후기 작품에서 오히려 대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처럼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외면적인 걸 떠나서 내적으로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 과거에 머물러 있을 순 없다. 과거를 현재로 자꾸만 끌고 들어와 자기만의 별에 갇혀 사는 건 오히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시그리드에서 헬레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마리아가 막상 마주한 현실에선 생각보다 많이 변한 자신이 서 있었다. 결국엔 시그리드가 될 것인지, 헬레나가 될 것인지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헬레나가 된다고 해서 내 안의 시그리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시그리드와 헬레나, 두 역할을 연기하는 마리아 한 사람처럼 시간의 흐름에 서서 우리 모두는 내 안의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마주할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한 감독이 마리아에게 23세기를 배경으로 한 SF영화 출연을 제안하면서 그녀의 캐릭터는 모든 나이를 대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에 서서 과거를 바라보며 나의 변화를 몸소 만끽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나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를 과거에 가둬놓는 대신 우리 미래를 예상해보는 거예요.
연극 무대를 준비하면서 마리아는 조앤에게 헬레나에 대한 여운이 남도록 시그리드가 조금만 머물렀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연기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조앤은 누가 헬레나를 신경 쓰냐며 얄미웁게 거절한다. 조금만 더 나의 시그리드가 오래 머물러줬음 하는 마음. 하지만 머물러주길 바라면서도 자비 없이 흘러가는 게 시간이고 순간이다.
마리아에게 헬레나라는 역할이 버겁고 힘들었던 건 생각이 많아서 일 테다. 그녀가 시그리드 역을 잘 해내었던 건 그만큼 어려서 그냥 받아들인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사실 헬레나 역도 마찬가지다.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나도 모르게 과거와 다른 나의 모습을 이따금씩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화하며 '취향이 욕망처럼 진부 해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늙어갈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들어와 골짜기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들어오는 말로야 스네이크는 그야말로 인간의 욕망과 흡사하다.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꼭 눈으로 한 번쯤 보고 싶은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사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악천후의 징후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를 매혹하는 이 진부한 욕망들에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오히려 그 구름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미련을 가질 필요 없다. 우리의 삶은 텍스트와 같아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 주어진 것에 매달리며 상상하는 건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뿐이다. 그러니 시간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우리는 변화의 흐름 그 자체다.
평점: ★★★☆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