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흔들렸지만 가장 뜨거웠던 우리의 순간을 그려내는 영화
고급스러운 게 흔한 것보다 낫지.
영화 <아이 엠 러브>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여름 3부작 중 하나다. <비거 스플래쉬>는 물장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랑의 욕망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지나가고 나면 그리워지는 여름을 닮은 첫사랑을 담았다면, <아이 엠 러브>는 한 여름의 뜨겁고, 싱그러운 사랑의 본연을 보여준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안토니오를 만나 그의 뒤를 쫓는 엠마의 모습은 존 애덤스의 ‘Lollapalooza’라는 배경음악과 함께 어우러져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설레임과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감정들을 역력 없이 잘 보여준다. 여기 루카 구아다니노만의 아름다운 미장센이 있다. 그는 엠마와 안토니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키스신을 과감히 편집한다던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일일이 묘사하지 않고 그들을 둘러싼 눈부신 햇살, 눈길을 사로잡는 색감, 생동감 있는 자연의 순간들을 빌려 우리에게 감정을 가장 있는 그대로 표현해내고야 만다. 엠마의 선명한 원색 톤의 드레스들은 그야말로 사랑의 색깔이다. 스토리라인은 크게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흔하디 흔한 불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그 흔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사랑만 하기도 벅찬 세상이다. 사랑이 우리 마음에서 겨울처럼 식어버렸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아이 엠 러브>가 선사하는 뜨거운 여름의 향기는 잠들었던 우리의 사랑을 다시 일깨운다.
영화는 엠마가 시아버지의 생신 파티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상황 속에서 연신 나오는 그들의 이야기 주제는 에도가 스포츠 경기에서 졌다는 소식이다. 에도는 상대가 나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며 기분 좋게 넘겼지만 가족들은 하나 같이 명망 높은 레키 가문이 한낯 셰프한테 졌다고 실망한다. 에도의 실패를, 아니 레키 가문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상대편의 탓으로 돌린다던가, 심판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며 의심한다. 회화가 아닌 사진을 공부하고자 하는 손녀 베타의 사진 작품에 대한 할아버지의 건조한 태도나 후계자 선정을 두고 벌어지는 가족들 간의 미묘한 눈빛들은 화려하지만 삭막한 레키 가문의 분위기를 묘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자식들을 챙기고, 어른들의 비위에 맞추어 상냥한 미소를 짓는 건 엠마가 해야 할 일이다. 식사를 앞둔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남편이 엠마의 손목에 장신구를 채워준다. 그런데 팔찌를 채워주는 소리가 마치 그녀에게 수갑을 채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엠마, 그녀의 시어머니, 그리고 에도의 애인인 에바는 어느 날 함께 식사 자리를 갖는다. 레키 가문에 들어온 여성들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이러한 길을 걸어온 여자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로또 맞은 것과도 같은 결혼 생활과 명망 높은 가문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진짜 이름도 잊어버릴 만큼 진짜 나의 삶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던 게 그녀들의 삶이다. 그런 삶에 엠마는 조금씩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 순간 다가온 셰프 안토니오는 그녀의 삶에 들어온 햇살이었고, 그의 오감을 자극하는 다채롭고, 싱그러운 음식들은 그녀의 닫혀있던 본능을 끌어올리는 마법과도 같았다. 안토니오는 러시아 여성인 엠마의 진짜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었다. 화려함으로 온몸을 장식해야 했던 엠마의 옷들을 벗기는 안토니오는 그녀의 남편과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안토니오는 엠마의 긴 머리카락을 직접 잘라주며 그녀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한다. 진짜 키디쉬로 살아갈 자유를.
에도는 아버지와 함께 후계자로 지명되며 할아버지가 이끌어왔던 회사의 비전과 가치를 따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이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린다.
과연 에도가 과거에 얽매여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정작 구식의 사고방식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상실하던 게 그들 아니었는가.
가문의 명예에 걸맞지 않은 실패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 나보다 위에 있는 자들을 폄하하며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림이 아닌 사진에 관심이 가는 손녀딸을 나무라듯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며 회사의 비전을 앞세우지만 뒤에서는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며 높은 위치를 굳건히 유지하는 레키 가문. 결국에는 회사를 매각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면 누군들 하지 못할까. 베타는 행복하냐고 묻는 에도에게 반문한다. “행복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이야. 오빠는 왜 행복하지 않은 거야?” 여기서 행복이란 에도는 행복을 원했지만 진짜 행복은 느껴보지도 못하고 메말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경영에서의 혼란스러움과 안토니오와 엄마의 관계에 대한 당혹감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게 된다.
어머니가 러시아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어머니가 끓여주는 러시아식 전통 수프를 가장 좋아했던 에도는 이 집안사람들과는 다르게 경기에서 자신을 이겼던 셰프 안토니오를 반겨주는 여유가 있었고, 베타의 동성애에 대한 고민들을 열린 마음으로 들어준 따뜻한 사람이었다. 시대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찌 다른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
안토니오와의 사랑이 점점 깊어질수록 아들에게 비밀스러운 관계를 들킬까 봐 엠마는 불안해한다. 그러다 사고로 아들이 숨지게 되고, 혼란스러운 엠마는 아들의 방에 누워서 꿈을 꾼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키디쉬 혹은 엠마.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모든 것을 상실한 표정으로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이리저리 도망치다 비로소 창문 밖으로 나가는 새의 모습처럼 엠마는 방에서 긴박하게 이 집을 떠날 짐을 싼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안토니오의 뒤를 밟던 때처럼 상황은 굉장히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그녀에게 이 집을 떠나는 건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만큼이나 긴장감 넘치고 격정적이다. 그렇게 짧은 머리를 하고, 운동복을 입은 그녀는 거울에 마주 선 듯 베타와 눈빛으로 인사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자유를 응원한다.
남편은 엠마의 고백에 '너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래,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고귀한 가문의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던 게 그녀의 삶이었다. 진짜 나를 포기하며 살아왔던 '엠마'의 삶은 가짜였다.
그리하여 엠마는 더 이상 과거의 키디쉬도, 현재의 엠마도 아니다.
그녀는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녀의 이름은 '사랑'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이란 건 몹시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랑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사람들은 반복하여 이 사랑을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무수히 흔들렸다. 내가 서야 할 자리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 뜨거움의 끝자락에 남은 건 결국 사랑이었기에. 고작 사랑이었기에. 그 흔한 사랑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