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처지를 이해해보는 영화
※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네가 와줘서 다행이다.
여린 마음
상처를 준 사람은 의도가 없었고
상처를 받은 사람은 죄가 없었다.
그렇게 의도 없이 불어온 바람에
누군가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채민성 <너에게 전하는 밤> 中
교통사고로 인해 부모님을 잃은 열아홉 영주는 동생 영인과 함께 살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앞에서는 한 없이 든든한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혹독한 현실 앞에서는 자꾸만 아이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슬픔으로 채워지는 마음을 반항으로 비워내려 하는 영인은 이리저리 사고를 치며 누나의 속을 썩인다. 친척인 고모에게서는 따뜻한 품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 가족의 추억의 보금자리였던 이 집까지 팔아야 한단다. 그런 영주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부모님 사진과 엄마가 남겨주신 옷, 그리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미래뿐. 그러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부모님을 죽게 만든 가해자 부부에게 찾아간 영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이런 불행을 낳게 한 그들에게서 행복을 빼앗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복수를 생각했던 맘은 이내 사라지고, 그 사람들에게서 행복한 삶을 꿈꾸게 된다. 과연 피할 수 없는 인연의 끝에서 그들과 영주는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가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힘들 때가 있다. 영주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나만큼이나 뻥 뚫린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주의 시선으로 바라본 향숙과 상문이 그랬다. 향숙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아들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맘으로 매일 기도를 하고, 상문은 과실치사로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쓰디쓴 술로 시린 밤을 넘기곤 했다.
반갑지 않은 사건이 우리의 평온한 삶을 침범해 들어오는 순간, 대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서로의 사연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사연에 빠져, 고통을 감내하고 슬픔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할 뿐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리도 아파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때, '영주'를 통해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이 영화는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아픈 경계 또한 지워내려 시도한다.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같은 사연, 같은 연유를 가진 자들만의 몫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어쩌면 정반대에 서있는 그들도 만나지 말았어야 할 우연을 탓하며 똑같이 망가져버린 삶을 위로하고, 다시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본다.
그렇게 상문, 향숙과 함께 지내면서 그리운 부모님의 따스함을 느낀 영주는 그들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그들 또한 영주를 딸처럼 생각하며 진심으로 아끼기 시작했다. 동생 영인에게 거듭 '누나가 있어서 좋지?'라고 물어봤던 영주는 아마도 힘든 삶을 꿋꿋이 버티기 위해서 누군가로부터, 세상으로부터 필요한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여린 마음에 맺힌 '네가 와줘서 다행이다.'라는 상문의 한마디는 영주를 살게 했다.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삶에 새하얀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주는 그들을 찾아가 모든 진실을 밝히게 되지만 마음의 벽을 허물수 있을 거란 일말의 기대는 곧 사그라들고 만다. 도저히 피해자 가족인 영주를 예전처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상처를 준 자와 상처를 받은 자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위안을 바랐지만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차갑다. 영주는 마포대교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일어나서 말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어른 아이에게 바치는 영화 <영주>에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그 미묘한 온도 차 속에서 나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대의 처지를 절실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아름다우면서도 아픈 이야기다. 누군가를 실컷 미워할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좋음과 나쁨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분명하지 않은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심연을 마주하게 되는 것.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을 안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평점: ★★★☆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