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벗어나면 보이는 것들

어쩌다 일주일 내내 집 밖에 나와있던 이야기

by Dear Yoor Day

잘 지냈어?

민화를 배웠었다니, 그것도 뉴욕에서 갤러리 큐레이션을 하는 멋있는 분에게 배웠다니…!

이런 기억은 인생에서 참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아. 너가 민화를 지금도 그리든 안 그리든 니 마음 속에 모란도는 이 때를 떠올릴 때마다 피어나겠지 :)


너의 모란도를 보자마자 나는 우리 엄마가 생각났어. 엘에이에 살았던 시기에 엄마도 한인타운에서 민화를 잠깐 배우고 나에게 그림을 주셨거든.

IMG_6007.heic (우리집 거실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엄마의 모란도 그림)

부귀와 행복한 삶을 소망한다는 의미는 몰랐는데 그냥 엄마가 일이 아닌 본인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며 만들어낸 작품이 생겼다는 게 참 기뻤어. 먹고 사는 게 늘 우선순위에 있어왔지만 엄마가 이제는 그런 마음가짐을 내려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해보길 바라고 있거든. 치열하게 살아온 엄마에게 그런 건 하루아침에 되진 않는 거 같아. 엄마처럼 치열하게 살진 않았지만 나 또한 외출은 정말 볼일이 있을 때만 하는 것으로 여겨온 세월이 길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문 밖을 나서는 경우가 잘 없는 거 같고.


저번 주에 어쩌다 보니 여행과 외출을 해야하는 일정이 가득 채워졌었어. 언제나 여행이나 외출을 하고 나면 그 뒤 며칠 정도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도록 계획을 짰는데 이번에는 너무 오래 전에 세웠던 계획과 갑작스레 생긴 일정이 나란히 이어지게 되었지.


삿포로와 토코나메.


연휴를 맞아 짝꿍이랑 삿포로에 다녀왔어. 둘 다 처음으로 가본 거였는데 정말 재밌게 놀다왔어. 도쿄는 이제 막 단풍이 물들고 있는데 삿포로 거리에는 눈이 쌓여있었어. 아직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아서 적설량이 그리 많진 않았지만 눈을 보자마자 아, 내가 정말 다른 도시에 왔구나 실감되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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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날 밤의 삿포로 거리풍경


DSC01373.JPG 눈 위에 쌓인 노란 은행잎들


눈 쌓인 풍경도, 일본의 도시라는 것도 새로울 게 없는 요소인데, 처음가본 장소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생경하게 다가왔어. 차가운 공기에 코가 시렸고, 커다란 네온사인, 도로를 가로지르는 초록색 전차를 보면서 내가 사는 공간과 환경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기분이 들었어. 눈과 뒤섞인 은행잎을 서걱서걱 밟으며 이 도시가 참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는데 도시의 활기와 그에 비해 거리를 가득 메우지는 않는 인파가 아주 적당하다는 느낌이었어. ‘딱 포틀랜드 정도다’ 싶은 붐비지 않고 여유로운 도시의 느낌. 나중에 남편이 알려줬는데 포틀랜드와 삿포로가 자매도시라는 거 있지? (역시 뭔가 통하는 게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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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1423.JPG 단풍이 얼마나 예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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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서 먹고 마신 것들


그에 비해 무척 조용한 마을도 가게 되었었는데, 삿포로에서 밤늦게 도쿄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나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 나고야 쪽에 있는 작은 도시 토코나메로 갔어. 이곳은 ‘토코나메야키’ 라고 해서 헤이안시대 (794~1185)부터 시작된 유서깊은 도자기가 유명한 곳이라 도시 곳곳에 도자기로 만든 설치물이 많았어. 막연히 ‘도자기마을’ 이라는 말에 끌려 가게 되었고 내심 경기도 이천 처럼 멋진 도자기 스튜디오가 줄지어진 곳에서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너무나 작은 마을이었어. 지인과 수요일에 마을 주요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도자기 산책길”을 걸었는데 가게들이 많지도 않거니와 그나마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너무 많은거야 ㅋㅋㅋ (나중에 알고보니 주말 장사를 하는 곳들이 많았어. 그만큼 사람이 주중에는 없어서겠지) 나나 지인이나 모처럼 멀리 여행온 것인데 너무 조용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 오게되어서 당황스러웠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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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코나메 인기 스팟인 거대한 마네키네코. 하지만 놀랍도록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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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가게와 당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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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동네이긴 했지만 뭐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토코나메에서 그 날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봤던 거 같아. 삿포로에서도 스프카레, 카이센동, 스시, 삿포로 맥주 처럼 유명하다는 것들을 먹고 마시면서 감기에 걸려있던 와중에도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사실 정말 짜릿하게 좋았던 순간이 언제였는줄 알아? 그렇게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서 누웠을 때! ㅋㅋㅋㅋ 이게 내 성향인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은 구경을 아주 많이 하면서 돌아다니고, 음식과 맥주 모두 아주 맛있었지만, 호텔방에 돌아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쉴 수 있었을 때 느끼는 아늑함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컸어. 내가 이런 감동을 호텔방에서 느끼기 위해 여기까지 온건가 싶을 정도로…!

DSC01378.JPG 그 어떤 관광스팟 보다 나를 가장 설레게 한 곳, 숙소 침대!

내가 하루종일 호텔방에서 뒹굴고 있었으면 느낄 수 없던 감정이겠지? 귀찮더라도 관광을 왔으니 뭐라도 하나 봐야한다는 생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으니까. 큰 숙제를 끝내고 돌아왔다는 성취감, 오롯이 편히 쉴 수 있다는 안도감. 이런 감정들이 루틴 형성에 아주 중요한 뼈대라는 이야기를 들었었어. 성실하게 내가 생각한 일을 해낸 이후에 어떤 불안함도 없이 휴식할 수 있는 자유를 번갈아 느끼면서 루틴이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고. 지난 번 편지에 루틴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적어보겠다고 했는데 사실 여행을 하면서는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도 않은 루틴을 지키는 게 참 힘들더라고. (라고 변명해보았습니다 ㅋㅋ) 하지만 내가 챗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난 생활을 해보면서 확실히 깨달은 거 같아. 정말 나에게 새로운 루틴이 필요하는 것을. 나의 챗바퀴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조립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여행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난 나의 생활공간을 벗어난 곳에서 지내보는 경험을 통해서 ‘내 일상 속에 나를 가둬놨었구나’ 하고 되돌아보게 해주었어.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약간 달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돈하고 싶어서 명상도 몇 번 했어. 너는 내가 명상을 자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ㅋㅋㅋㅋ 나도 요즘 마음먹고 자리에 앉아야 할 수 있더라고. 한참 요가를 할 때엔 아침 저녁으로, 하다못해 요가 시작 전이나 요가를 끝내고 사바아사나를 하는 동안 명상을 했는데 지금은 매트 위에 오르는 것도 힘들고 말야. 도자기도 그래서 시작했던 것 같아. 어딘가에 오롯이 집중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방식으론 자신이 없어서 대신 뭔가를 집중해서 만들어보기로 했던 거지. 실제로 처음 들었던 도자기 교실 선생님은 수업 시작에 앞서서 다같이 5분동안 명상을 한 이후에 시작했었어. 아마 클래스 이름도 “Mindful Clay” 였었지. 흙을 만질 때에도 생각이 많아지면 그게 꼭 티가 나거든. 어딘가 너무 힘을 주어서 모양이 뭉그러진다던지, 욕심을 내서 더 성형을 하다가 구멍을 낸다던지 하는 것들. 너가 인용한 민화 수업의 구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조바심을 가지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불안해하는 대신 차분히 기다리면 균일하게 칠해져 있을 거라는 말. 도자기도 흙이 조금 마른 후에 얼마든지 더 고칠 수 있는 것들을 기다리지 않고 흙에 물이 너무 많은 상태에서 더 고치려다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당장의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마음으로 뭔가를 하면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은 거 같아.

Screenshot 2025-11-19 at 11.55.24 PM.png 내가 들었던 수업. 가격은 좀 (많이) 오른 것 같다...

내 유튜브에 요새 자주 보이는 숏츠 중에 빵실베이킹 이라고 집에서 미니 오븐으로 베이킹 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만드는 과정만 보면 실수도 많고 저러다가 망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막상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나쁘지 않거든. 그걸 보면서 예전에 내 친구가 나한테 해준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 그 친구하고 프랑스 여행을 하던 때였는데, 자기가 요새 드로잉을 취미로 한다면서 나하고 같이 카페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자는 거야. 근데 나는 그림도 잘 못 그리고, 하다보니 삐뚤빼뚤 너무 맘에 안 들어서 징징 거리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그림 선생님이 “삐뚤어도 일단 완성해야 한다” 라고 했다는 거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리다만 그림은 아무리 잘 그리던 것도 미완성이여서 그림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완성하면 그건 그림이라고 하셨다는 거 같아. 그 베이킹 하는 분도 만들면서 실수가 나오고 뜻대로 안될때에 멘탈이 흔들려도 어떻게든 끝까지 완성하시거든. 그런 마음으로 매사 마침표를 찍겠다는 마음을 가지려고. 뜻대로 시작하지 않은 하루일지언정, 원하는 일을 반도 못했을 지언정 그 하루의 마침표를 좋은 휴식 시간으로 찍으며 오늘도 괜찮았다고 내일도 성실하게, 아쉬운 것들은 조금 다르게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Screenshot 2025-11-19 at 11.57.37 PM.png 와일드한 과정
Screenshot 2025-11-19 at 11.57.48 PM.png 그러나 완성...!!


이번 주말 도쿄 K-Book 페스티벌에 오시는 김하나, 이옥선 작가님들을 뵙기 전 이제야 이옥선 작가님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전업주부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작가님이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게 느껴지는 구절이 있었어.



젊었을 때는 지지부진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인생에서 중대한 뭔가를 빠뜨렸거나 어딘가에 더 중요한 인생의 알갱이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갈등한 시기도 있었다. 하나 중대한 것은 바로 그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일상이 깨어져봐야 아무 일 없이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거나, 거처를 본의 아니게 옮겨야 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천재지변이 나는 등등의 일 없이 일상을 잘 지내왔다는 것이 평탄한 인생을 무리 없이 잘 살아왔다는 뜻이 된다. 별일 없는 일상을 가족들에게 제공하는 역할이 전업주부로 살아온 나의 할일이었던 것이다.

- 이옥선 <즐거운 하루> -



나도 늘 어딘가에 빠뜨린 것 같은 알맹이를 찾느라 불안한데, 일상을 평탄하게 유지하다보면 그 일상이 나의 알맹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

너에게도 평탄하지만 뿌듯한 하루를 위해 재정비 중인 일상의 요소가 있는지 궁금해지네.

텍사스는 이 곳보다 따뜻하겠지만 그래도 감기 조심해 ♥ 또 쓸께!

- 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