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모르겠는 일
잘 지냈어? 땡스기빙 시기의 너희 동네 사진을 보니 아 정말 미국이다 싶네 ㅎㅎ 어디에선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걸로 떠들썩 했겠지만, 땡스기빙의 정석은 테이블 가득 올라온 음식을 실컷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밀린 이야기를 와인잔 가득 부어마시다 소파에 늘어져있을 수 있는 연휴잖아. 곧 12월이라는 사실에 설레고 서운하기도한 감정이 할로윈 풍경에서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찬 거리사진에서도 느껴졌어 ㅎㅎ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지난 편지를 받고 내심 아주 놀랐었어. 내가 이따금씩 갑작스레 떠오르는 말이나 문장을 그냥 적어놓을 때가 있거든. 내가 하고있던 일이나 내가 있던 장소 같은 거랑은 전혀 연관이 없어서 왜 떠올랐을까 나중에 고민해보려고 일단 써놓는 건데, 그 중 하나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원래 그래도 되는 사람 이에요?” 였거든. ㅋㅋㅋ 웃기지? 무슨 드라마에서 두 인물이 싸우다가 한 쪽에서 내뱉을 만한 말인거 같기도 하고.
“원래 그런 사람”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이라는 거잖아? 흔히들 사람은 안 변한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게 사람아닌가 싶기도해. 변화의 크기가 작던 크던 간에 말야. 올해 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눈에 띄는 성장이나 대단한 업적을 이뤄서는 아니야. 이전에 읽지 않았던 책을 읽었고,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알았던 사람과 더 시간을 보내보는 꽤나 일상적인 일들로 인해 빚어진 변화들이 켜켜히 쌓인 거 같아.
최근에 너도 아는 지인 P가 내가 사는 곳에 놀러왔어. 함께 밥을 먹고나서 이 친구가 나를 유명한 커피 테이스팅바에 데려가주었지. 아주 비싸고 고급인 팔로마 게이샤 커피콩으로 내린 드립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P는 그 공간의 레이아웃이나 거기서 쓰는 장비, 내가 주문한 커피의 농장과 자신이 주문한 커피 농장의 차이점, 왜 특정 커피콩과 추출방식에 따라 다른 물을 사용하는가 같은, 정말 나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해주었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커피 한 모금을 내 모든 감각을 사용해서 맛보려고 했고 그래서인지 커피가 정말 맛있더라구!
커피집을 나와서 내게 어땠는지 묻기에 나는 그 공간이 참 좋았고 커피도 아주 맛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친구는 그곳에서 실망했다는거야? 놀라서 왜 그런지 물으니 그 대답이 참 흥미로웠어. “좋은 커피콩으로 맛있게 내린 커피.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난 그것만을 위해 거길 간 게 아니었다.” 나는 문득 ‘커피집에서 커피만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P의 말을 들을수록 그 친구의 기준이 이해가 되더라고.
이 커피 테이스팅바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바리스타가 있는 구조인데 이게 커피 경연대회하고 동일한 구성으로 되어있대. 그렇다면 P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 바리스타가 대회에 나와서 서빙하는 것과 같은 퀄리티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건 단순히 좋은 커피콩을 골라 잘 추출하는데서 그치질 않는대. 손님에게 어떤 커피를 권하고 어떤 맛인지 설명하는 것. 콩을 갈고 물을 따를 때 얼마나 정갈하고 움직임에 낭비가 없는지. 내가 커피를 기다리며 P와 이야기 하는 동안 나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을 P는 전부 보고 있었더라고.
P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흑백요리사 심사위원인 안성재 셰프가 운영하는 <모수>에 다녀와서 쓴 얘기가 떠올랐어. 코스 메뉴를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나왔는데, 테이블로 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뭔가를 화장실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았대. 그래서 다시 화장실에 갔는데, 그 한 20-30초 사이에 자기가 방금 썼던 세면대가 물기 하나없이 깨끗하게 닦여있었다고. 이 얘기를 P에게 해주었더니 자기가 얘기하는 것도 바로 그 맥락이라고 얘기하더라고. 미슐랭 레스토랑에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는 음식만 맛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세심한 서비스와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식사값에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그런 면에서 P는 나를 데려간 곳이 부족한 게 많다고 느꼈대.
그러면서 커피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한 내게 자기가 김빠지는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내 경험을 바꾸지 않았어서 전혀 그럴 게 없다고 했지. 나에겐 정말 맛있는 커피였거든. 그리고 되려 P가 이런 얘기를 해주어서 나는 쉽게 속단할 수 있던 세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거든. 일에 있어서 퍼포먼스만을 중시하게 될 때가 많지만 그 퍼포먼스로 가는 과정과 이후의 결과까지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서 나에겐 큰 배움이 되었다고 생각해.
이전에 너에게도 공유했던 편집자K님이 친구와 나눈 대화도 떠오르더라. 직업을 결정할 때에 무슨 일을 해서 얼마를 버는가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들과 일하게 될 지가 무척 중요했던 편집자K님은 그래서 출판사의 편집자가 되었다고 말했지. 생각해보면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그 한 접시를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과 완성된 음식을 맛있게 먹는 손님까지 모두 중요한 과정일테고. 가수들은 기획사, 작곡가, 세션팀과 호흡을 맞추면서 퍼포먼스를 완성하고 그것이 관객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까지 모두 중요하겠지.
내가 “원래 커피만 맛있으면 장땡인 사람”으로 머물지 않은 것이 이 모든 배움과 깨달음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어. 그렇다고 앞으로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전문가인냥 이것 저것 꼼꼼하게 따지고들진 않을거야. 오히려 내가 얼만큼을 모르는지 알게되어서 더 겸손하게 커피를 대할수도 있겠지. 모르는 만큼을 아는 과정이 참 괴로운 면이 있는데 모른채로 고여있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이 따라오기 마련인가봐.
장래희망이 ‘아나운서’ 였다는 귀여운 고백을 해주었는데 내가 한 때 대통령이 꿈이었다면 믿기니? ㅋㅋ 부끄러우면서도 뭐든 내키는 대로 꿈꾸고 상상해볼 수 있던 그 때가 그립기도 해. 점점 타인의 삶이 손가락 터치 하나 너머 가까이 자리잡은 세상에서 나는 나대로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나를 알고 탐구하는 일이 중요해지는 거 같아. 어떤 조직의 일원으로서 보다는 개인으로서, 나로서 어떤 삶을 꾸릴 것인가, 어떤 ’나’로 살 것인가 같은 고민들. 연말에 우리가 이런 생각들을 서로에게 말하며 정리하고 남겨둘 수 있어서 참 기쁘네 맛집 공유, 예쁜 아이템 공유도 좋지만 이런 고민 공유할 수 있는게 해가 지날수록 더 귀해 ㅎㅎ
추워지는 겨울 부디 건강히 지내고
미리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