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을 거스르고 때론 부딪혀보는 것에서 다른 가치가 창출된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발견
점점 나이가 들 수록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생길까?
나만 놓고 보자면 그렇다.
한 사람과의 오랜 연애를 하다 보니 이 사람과 소비하는 시간 자체에 흥미를 느낀다. 다른 쾌락을 찾을 수도 있지만, 신뢰도가 커질수록 평안함이 찾아오기 때문인 것도 같다. 평안함만을 가지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내가 왜 내 인생에 불안함을 주입시켜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새로운 친구의 연락이라던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친구의 연락에는 다소 몸이 경직된다. 참 안 좋은 생각 중에 하나이지만 이 사람과 얼마나 길게 관계가 이어질까에 대한 의문이 선행되니 주저하게 되고 망설여진다. 관계는 쳇바퀴를 굴리며 순환해 나가는 과정이지만, 선입견과 작지만 부서지지 않는 벽 때문에 더더욱 한 사람과의 시간만 추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부작용이 있다. 내 시간이 특정 인물에 고착화되기에 시간이라는 속성은 다른 사람, 다른 것들로부터의 허들을 만든다.
자연스레 멀어지는 관계 속에서 알게 모를 불안감이 생기는 것도 부작용 중에 하나이다.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의 총량 자체를 줄일 수도 있지만, 때론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도 있을 것이고 나의 욕망이 그 관계에 대한 불안감을 덮게 되면 경직된 몸은 자연스레 풀리고 관계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운동을 하다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 10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물론, 나는 처음에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선뜻 인사를 건네준 그 친구의 아량과 호의에 감사했고 5분 정도의 인사를 나누고 그곳에서 헤어졌다.
몇 주 뒤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헤이, 같이 운동하지 않을래? 내가 하고 있는 팀이 있는데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앞서 말한 것처럼 또 한 번의 숨이 막혔다. 곧바로 나의 세포는 거절의 이유를 나열하며 그중 하나를 고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한 번만 거절하게 되면 그 친구의 연락이 오지 않겠지라며 나열된 거절의 이유를 선택하려던 찰나 내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드러난다. 이렇게 말이다.
요새 운동을 못하긴 했는데 같이 운동하면 좋은 거 아닌가? / 한 번 운동하는 거야 어렵지 않잖아 / 그래도 그 친구가 먼저 용기 내서 연락해 줬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이라면 잠깐 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 관계에 대한 불안함을 무의식적인 나의 욕망이 덮는다. 경직스러웠던 몸은 이내 풀렸다. 불안함과 염려 앞에 놓인 부분에 나의 욕망이 그것을 덮는다.
나는 이 욕망이 단순히 부정적인 욕망이 아니며, 내가 그간 생각해 왔던 틀을 깨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를 그 환경 속에 가두기로 한다.
그래서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좋아! 하자!”
이미 텍스트로 나의 의사를 전했고, 지울 수 없는 증거가 되었다. 운동을 하고 그 친구를 만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건 나 자신이었고, 욕망이 불안함을 상쇄시켰다.
음? 꽤나 이상하다. 간단하다.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이내 깨닫는다.
나의 욕망은 때론 쌓아왔던 본성을 거스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욕망이 보통은 부정적인 경향이 많지만 위와 같이 긍정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 그 친구를 만났다.
나의 염려와 걱정과는 다르게 운동이라는 내 욕구도 채웠고, 그 친구의 호의와 낯선 환경 속의 챙김 덕에 기분 좋은 관계가 형성된 것만 같다.
색안경을 끼고 관계를 바라보면 자동적인 기피 현상만 남게 된다.
때론 관성을 부수고 나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인지하여 관계에 대한 불안함을 상쇄시켜 보는 건 어떨까?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꽤나 얻는 것이 많다.
나를 그 환경에 놓이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 결정을 빠르게 내리고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
이것이 또 다른 나와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