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아물어가며 사는 길 자체에 행복이 있길 바라며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며 출근하고 퇴근하는 삶을 살아내 가는 24년 지기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까이 있었음에도 그 친구를 살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같이 다녔던 수십년지기 친구고, 그 친구는 간호사다. 나이를 먹으며 자주 보진 못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관계를 형성해 와서 그런지 정겹고 편안한 친구이며 안부 정도는 알고 있는 사이다.
한편,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일하는 곳이 가장 힘든 곳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간호업계는 그중에서도 꽤나 힘든 축에 속한다며 이야기한다. 업계를 자세히 알지 못해 관련하여 논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지만 적어도 친구의 말을 빌려보자면, 환자와 직장 동료에 치여 매번 눈물과 동행하는 굉장히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
더욱이나 친구는 2개월 차다. 보고 체계에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는 상태고, 각기 다른 선임의 요구사항에 어느 장단을 맞춰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환자가 친구에게 비도덕적인 행동을 가해도 암묵적으로 넘어가야 할지, 환자에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상태다.
매번 눈물로 출퇴근을 반복하는 친구의 얼굴을 오랜만에 봤는데, 몹시 서글퍼보였다. 활기차고 당당했던 표정은 어느새 조그마한 벽 뒤에 가리어져 있었다. 자신의 근황과 일 관련한 이야기를 내뱉을 때면 자꾸만 감정이 올라와 울컥했다. 급기야 모든 것을 본인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음이 많이 아린 이 친구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은 무엇일까를 수십 번 되뇌었다. 자칫했다간 그 친구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지 못한 채 동정으로만 끝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전해야 했기에 고심 끝에 친구에게 말했다.
"주변 가까이에 이렇게 힘든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미안하다. 그저 기도할게."
"그리고 울어, 힘들면 실컷 울자 그냥. 끝없이 아파해도 보고 힘이 나지 않을 땐 목이 아프도록 울어"
마음이 곪을 대로 곪은 친구에게 '좀만 참아 그 시절엔 다그래, 곧 잘 풀릴 거야, 그럴 땐 이렇게 해봐'와 같은 말을 전하긴 싫었다. 많이 지친 상황에 다다랐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곳의 문화와 상황, 그리고 체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내가 실질적인 해결책을 말해주자기엔 피노키오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싫었다. 9년 전의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강원도 철원의 한 군부대 화장실에서 하염없이 울었고, 울음소리와 빵 듣는 비닐 소리를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고 빵 한 조각을 씹어 먹었다. 그때 내 마음을 알고 유일하게 손 내밀어주던 선임은 실컷 울고, 끝없이 아파해보라고 말해주셨다. 울고 나니 더 개운했고, 오기가 생겼다. 긍정적인 들끓음은 이내 성장으로 승화되어 이후 중대의 막중한 임무도 맡게 되었다.
그 친구가 나와 같은 심정인지 확신하기는 어려웠으나 내가 겪었던 부분을 빗대어 나의 진심을 오롯이 전할 뿐이었다. 내 말이 되려 그 친구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곧바로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았을 거다.
다행히도 그 친구는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내 얇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 친구의 얼굴을 보고 또다시 말했다.
"다 너 탓 아니니까 어깨 펴~"
힘이 들 땐 때론 무너져봐야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알 수 있다. 그 무너짐이 두려울 수 있으나 두려움에 잠식되면 일어나는 법을 알지 못한 채 마음에 병을 키운다.
나는 그 친구가 곧장 다시 일어날 것이라 확신한다. 간호사이니 자신의 마음 또한 잘 간호하리라 믿는다. 성장은 성장통 없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아픔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아픔들이 가시가 되어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때론 아픔을 아물어가며 살아가는 그 길 자체에 행복이 인사를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린, 행복이 건넨 인사를 따스하게 받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