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발견한 공간이 주는 인사와 선물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발견
카페에서 집중이 더 잘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그중 알쓸신잡에 방영된 정재승 교수님의 분석은 이렇다.
카페는 사적공간과 공적공간의 경계에 있고, 이를 내 맘대로 컨트롤할 수 있을 때 몰입이 극대화된다.
-정재승 교수-
공간의 경계라는 부분이 굉장히 신선하다. 간극이 꽤 클 것이라 생각했는데 경계에 있다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분석이 내게도 적용된다. 몰입이 주는 효과를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경계선을 넘을 때면 온전한 집중을 하기 어렵다. 메일 확인, 수많은 연락들, 자극적인 콘텐츠는 뱀의 혀처럼 간교하게 틈을 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준다.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다.
유혹을 떨쳐내는 것이 쉽지 만은 않다. 발버둥은 친다. 잠시 스트레칭을 한다거나,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모든 알림을 끈다. 이도 소용없을 땐 조금은 우습게도 그냥 보며 포기한다. 잠시 보고 다시 집중하면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유혹에 빠진 후 다시 정상궤도로 올라와 집중하기란 오리발을 신고 축구공을 골대로 제대로 차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차선을 택한다. 잠시 고민한 후 타임타깃을 정하여 특정 시간 이후에는 다른 장소로 옮기고자 다짐한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면 괜찮지 않겠나 싶어서.
처음 생각한 곳은 근처 백화점 내 곳곳에 비치된 앉을 수 있는 쉼터이다. 2층과 3층을 둘러본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앉을 곳은 있지만 테이블은 없다. 딱딱한 대리석으로 이뤄진 그곳엔 사람들이 꽤나 있다. 다만, 간단한 작업을 하기엔 마땅치 않은 장소다. 아쉽게도 이곳은 다음을 위한 장소로 부적합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다시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처럼 곳곳을 살피기로 마음먹는다. 마침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매번 출입구인 2층을 통해 이동했기에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긴 채 평상시 잘 가보지 않았던 1층으로 내려가보기로 한다.
내 몸이 아래를 향해 이동하며 위에서 아래로 보이는 환경이 점점 생경하다. 그리고 나는 몇 초 뒤 예기치 못한 공간의 문안 인사에 자동으로 손을 흔든다.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는 둥근 쉼터가 보인다. 멀리서 보이는 간단한 데스크도 있다. 마치 구석에 박힌 책 사이에서 발견된 만원 같은 느낌이다.
공간 테두리에는 몇몇 사람이 있지만, 데스크 내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여러 책들이 놓여있다. 앉아서 쉼을 만끽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마침, 데스크에 자리도 비었다. 가까이서 이곳의 이름을 확인한다. 백화점 내 ‘샬롯책방’이다.
이곳의 테마는 ‘쉼’이다. 안락함을 한 껏 고조시키는 식물들, ‘쉼’이라는 짧지만 풍요로운 단어와 함께 만들어진 인테리어들. 그리고 그곳에 놓인 데스크. 나는 백화점 내 공간을 마련하여 소비자들에게 쉼을 선물하는 샬롯책방에 잠시 머물기로 한다.
이곳은 마치 별마당 도서관의 축소 버전이다. 잠시 자리를 잡고 원 한 바퀴를 둘러본다. 둘러보며, 눈에 들어오는 책 제목을 살핀다. 수백 가지의 책 제목들이 자기를 봐달라며 손짓하지만 그중에 눈에 들어온 제목들이 아래에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넘길 수 있으나 어떠한 제목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한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나중에 활용해 보고자 생각한다.
아이러니 한 점은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휴대폰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책방이지만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상황이 웃프다(웃기고 슬프다). 나조차도 독서를 위해 온 것이 아닌 것처럼.
자리에 돌아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이 상황을 글로 남겨보는 것이다. 본래 다른 작업을 할 목적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느낀 경험을 표현하고 기억해 두는 것만으로 집중과 몰입을 하면 된다. 사실 키보드로 글을 타이핑하는 지금 이 순간도 얼떨떨하다.
다시 한번 생각한다. 백화점 내에 서점도 아니고 쉼터를 활용한 독서라.. 다소 신박한 조합 아닌가? 공간으로써의 제1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변주를 주는 것 또한 괜찮은 시도이자 방법이다. 결국, 그 공간에 머무르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본질을 잃지 않았다면 다소 그 중심에서 벗어난 과감한 시도는 다시 본질로 이어주며 본질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점점 머리가 맑아진다. 마침 에스컬레이터 바로 앞 1층에선 시향을 진행하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고 은은한 향이 코끝을 때리며 공간에 더 머무르라며 내게 속삭인다. 그 유혹에 조금만 더 몸을 기대 보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라면 장 시간 서서 무언가를 하기엔 힘들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글을 쓸수록 고개가 숙여진다. 똑같다. 그런데 분명 이 속담의 뜻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슬슬 갈무리를 짓고 자리를 떠날 시간이다.
결국, 핵심은 가끔 집중이 되지 않을 때 환경을 변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다른 생김새, 성격,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억만장자의 돈으로도 추가로 살 수 없는 시간 말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그저 즐기는 것도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오늘처럼 시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이롭게 사용하는 삶에도 행복이 있다. 집중이 되지 않아 억지로 머물며 부여잡는 시간은 의미 없는 손실을 낳는다. 그래서 거장들은 산책이 필요하다 말하고, 무언가 변곡점을 만들 만한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나 홀로 고요하던 데스크에 반가운 방문객이 찾아왔다. 백발의 중절모를 쓰신 어르신이다. 어르신은 내게 여기서 뭐 하냐고 묻는다. 나는 이 공간에서 느낀 감정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잠시 내 말에 혹하시는가 싶더니 아무 말씀 없이 휴대폰을 꺼내어 충전기를 연결하신다. 잠시 뒤 어르신은 '세상이 요즘 흉흉해~'라는 한마디만 남기신 체 뉴스를 보신다.
뉴스를 보기 위해 에너지를 재충전하며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 하시는 그분의 몰입과 집념이 새삼스레 존경스럽다. 그러곤 아무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한동안 본인의 시간을 오롯이 보내신다.
나는 이내 또 한 가지를 깨닫는다.
저마다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 이곳의 본디 목적은 책일 수도 있겠으나 책으로 포장된 포장지를 벗겨보니 그저 ‘쉼’의 공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잠시나마 자유할 수 있는 쉘터. 안식처. 그 자체로도 쉼터의 역할을 다했다. 나의 목적, 추구하고자 하는 행위에 따라 내가 선택한 곳이 다양한 공간으로 변주될 수 있다.
7만 8천 평 거대 백화점 안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간은 내게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동시에 단편화된 생각을 뒤집어 줄 수 있는 귀한 선물이었다.
점점 사람들이 몰려온다. 털썩 주저앉은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을 악착같이 살아내고자 하는 향기가 느껴진다. 숭고하며 고귀한 향기이자 책임감의 형태를 맡으며 나는 자리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