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은인을 만났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발견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강원도 영월 숲 속의 아침 오토 캠핑장. 텐트는 점점 무너져가고 실내로 빗물이 쏟아져 도저히 머무를 수 없어 철수를 다짐한 그때.
나는 아이언맨 보다 훨씬 멋지고, 존경스러운 노년의 사장님 부부를 만났다. 그분들은 우리의 은인이었다.
현재 나는 자연과의 삶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된 조그마한 텐트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릴 수 없어 활자를 타이핑하고 있다. 기억이 휘발되지 않고 느낀 감정을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이곳을 또렷이 기억하기 위해.
캠핑장은 퇴사 이후 계획했던 내 플랜 중 하나였다. 삶의 무게를 던져버리고, 신이 주신 자연이라는 선물을 받아 누리기 위함이었다. 더운 날씨가 예상되어 계곡 근처 캠핑장을 찾았고 집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영월의 어느 한 캠핑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달 전 미리 예약을 진행했고 날짜가 다가올수록 들뜬 마음이 일렁였다.
하지만 날짜가 다가오기 전 요 며칠, 폭우와 장마 전선의 일기 예보 소식을 접한 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고른 곳이었고 날씨가 좋길 바랐지만, 날씨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솔직히 부푼 기대감이 다소 상실되었지만, 이왕 가기로 결정했으니 좋은 경험을 하고 오리라 다짐했다.
도착 후 인자하신 미소를 지니신 사모님께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사모님은 기존에 우리가 예약했던 사이트(캠핑장 구역을 일컫는 말) 말고 다른 곳도 사용할 수 있고, 예약이 없으니 편하게 둘러보고 선택해도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 덕에 더욱 널찍한 공간을 선택할 수 있었고, 계곡과도 가까웠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우리는 곧장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장대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무심하지시,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슬프실꼬. 우리는 바삐 우비로 갈아입고 텐트를 설치했다. 비는 우리의 행동을 조금 더 느리게 만들어 지친 상태로 바뀌길 바랐겠지만 우린 견뎌냈다. 우리는 그렇게 완성된 안식처를 통해 뿌듯함과 성취감을 배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만의 공간이 생성되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채워 넣으니 마치 일상으로 소진된 삶의 여유를 채우는 것만 같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는 마치 바쁘게 달려온 우리에게 박수를 건네주는 것만 같았다. 행복이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불평불만이 뭐 그리 많은 지 하늘의 외침은 수많은 곳 중 우리의 거점 위에도 다다랐다. 거센 빗소리는 불안함을 증폭시켰다.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편안함을 찾으러 온 곳에서 불편함을 마주하기 시작하자 이내 불안함으로 승화되었다. 이후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별거 아니겠지라고 생각한 찰나에 텐트에서 물이 세기 시작했다. 전실(텐트의 앞 공간, 보통 요리 공간으로 활용되는 곳)에는 물이 세어도 그 다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너텐트(보통 잠을 자는 공간)에도 미스트처럼 물이 새기 시작했다. 위기였다. 거세지는 빗줄기는 우리를 내쫓을 심성인 건지 더욱더 크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철수를 생각했다. 도저히 보수공사가 되지 않을 것 같던 찰나에 마지막으로 다시 점검해 보자며 우린 밖으로 향했다. 우비마저 뚫고 들어오는 비는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저곳 보수를 하기 시작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탄식 섞인 우리의 목소리가 철수에 방점을 찍었다. 답이 없었다.
하나 둘 고정된 줄을 풀기 시작한 그때, 저 멀리서 텐트를 정리하는 어르신이 보였다. 우리의 결정에 확신을 더해주는 듯 어르신도 철수를 감행하기로 결정했으리라. 어르신은 재빨리 텐트를 접었고 모든 것을 치우기 시작했다. 막힘없이 텐트를 정리하는 어르신의 모습에 우리도 탄력을 받아 더욱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어르신이 어디서 왔으며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시고픈 마음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던 그때, 어르신이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오시며 말씀하셨다.
대형 타프를 설치하면 비를 막을 수 있으니까 그쪽 텐트에 얼른 같이 설치해 봐요~
네? 어르신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괜찮습니다. 어서 정리 마무리 하세요!
에헤이, 나 여기 사장이에요. 집사람이랑 쉬는 공간으로 설치해서 쓰고 있었는데, 그쪽이 비는 피해야 할거 아니야~ 기둥 세우고 묶어서 텐트 위에 타프 설치하면 비 피하고 편안하게 잘 수 있을 터이니 그렇게 해요~ 어서 빨리!
아! 사장님이셨군요. 너무 감사합니다. 저는 사장님인 줄 몰랐어요!
허허 아무튼 나 좀 보조해 줘요. 얼른 한 번 같이 설치해 봅시다. 편안하게 자야지~
네, 너무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들의 안식처를 정리하고 타인의 안식처를 살리기 위해 도움을 주신 사장님.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던 식기류들과 모든 물건을 정리하신 후 우리를 도와주신 사장님. 일말의 고민도 없이 우리의 편안함을 위해 본인의 불편함을 자처하신 사장님.
미안한 감정, 감사한 마음,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이 내 마음에 동시 다발적으로 찾아왔다.
우린 그렇게 우비를 쓰고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사장님의 세 번째 손이 되어 열심히 도왔다. 노년의 사장님은 우리를 위해 묵묵히 비를 맞아가며 줄을 잡아당기고, 돌을 치우고, 기둥을 세우는 등 아낌없는 헌신을 보여주셨다. 제대로 설치가 되지 않았는지 기초를 수십 번이나 다잡으며 본인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까지 작업을 진행해 주셨고, 나는 그것을 묵묵히 도왔다.
더 놀라운 것은, 대형 그늘막을 설치하는 내내 나의 불안한 마음을 바로잡아 주셨다.
비가 참으로 재미있게 오지~ 곧 그칠 테니 너무 걱정 말아~ 다 설치되고 나면 편안히 잘 수 있을 거야~
아이고, 줄이 조금 짧네 걱정하지 말아 긴 걸로 줄여 쓰면 되니까~ 저쪽에 줄 또 있으니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려요~
이 부분이 엉켜있네~ 풀고 다시 하면 되니 이것만 좀 잡아줘요~ 그렇지 그렇지. 그렇게만 하면 문제없어~
지금 기둥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서 불안하지~ 조금만 기다려 걱정 없이 잘 수 있을 테니~
아직도 어르신의 말이 생생하다. 꾸밈없고 진실된 어르신의 말에 몇 번이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어르신은 내 마음 하나하나 다 어루만져 주시고 계셨다. 작업이 불편하니 두 팔 걷어 망치질을 하셨다. 줄이 당겨지지 않으니 끙끙 거리며 팽팽하게 당기셨다. 엉킨 매듭이 풀리지 않으니 차분하게 자세를 고쳐 잡으셨다. 내게 어르신은 아이언맨보다 강했고, 멋진 어른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
어르신을 보며 삶을 보았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정수.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묵묵히 그늘막을 설치하고 위로를 건네주셨던 어르신의 따스함. 혹시라도 내가 설치한 그늘막이 무너지거든 내 방 옆으로와 자라고 하시던 어르신의 배려. 모든 것을 마무리한 후 세상에서 제일 널찍한 어르신의 뒷모습.
나는 어르신에게 은인이자, 삶을 가르쳐준 분이시라며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후 사모님이 오셨다. 멀리서 보는 데 안쓰러웠다며 사장님께 작업을 부탁했다고 하셨다. 이곳까지 왔는데 돌아가게 하기 너무 미안하지 않느냐며 우리가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자 말씀하셨다. 너무나 아름다우신 두 분이 일 평생을 살아오고 계시다는 사실에 나는 꼭 두 분과 같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말씀드렸다. 모든 것을 설치한 이후 우리 넷은 다시 한번 계곡을 찾아갔다. 사모님은 말씀하셨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여기까지 와줘서 우리가 더 고맙다고 하셨다.
나는 솔직히 모든 것이 찢긴 느낌이었다. 이렇게 대가 없이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도움을 주시던 어르신들의 모습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가식과 좋은 것만을 취하고, 득과 실을 따지며 살아갔던 나의 삶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선함을 베풀며 인생을 살아가고자 다짐했던 나의 마음이 벌거 벗겨진 느낌이었다.
이것은 곧 배움이었다.
어르신들을 그냥 돌려보내드리기 싫었다. 우리는 무엇이라도 보답하고자 모든 것을 뒤졌다. 변변치 않은 것들 투성에 너무나 아쉬웠지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았다. 어떠한 걸로도 대신할 수 없겠지만, 마침 딱 하나를 가져온 골든 파인애플을 모두 건네드렸다. 이것조차 너무 아쉬운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필요하지 않았다. 간곡히 우리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뭘 이런 걸 주냐며 편히 자다 가면 그것으로 족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다행이었다.
다시 회복된 우리의 쉼터엔 여전히 어르신들이 남기고 간 온기가 있다. 평생 이 온기가 우리의 삶 곳곳에 가득하길 소망한다. 꼭 보듬고, 꽉 움켜잡아 희망이자 쉼을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해 줄 수 있게.
그늘막은 어르신들의 땀이 섞인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과 동시에, 쉼과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행복이자 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