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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고 May 09. 2021

책임을 진다는 것

웹툰 <곤GONE>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성아이돌 그룹 EXO의 멤버 첸이 결혼을 발표했을 당시 EXO 팬인 친구에게 발표에 대한 팬의 입장을 물어봤다. 첸은 열애설도 없이 바로 결혼을 발표한 데다가 배우자가 혼전임신한 사실이 밝혀져 팬덤이 엄청난 비난과 함께 탈퇴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EXO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그룹인 만큼 그룹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친구와의 관계나 임신 사실을 소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첸의 선택이 대단한 결심처럼 보였다. 비난이 자명한 상황에서 여자친구와 아이를 책임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야. 칭찬받을 일이 아니고. 애초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처신하는 게 걔가 했어야 할 일인 거라고”


팬덤 문화를 이해해보려고 시작한 대화는 나에게 다른 의미로 오래오래 남았다. 물론 친구가 말한 의도와 내가 받아들인 의도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친구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한 ‘그 일’은 첸이 활동하는 그룹에 폐 끼칠 일을 의미했지만 내가 받아들인 ‘그 일’은 책임진다는 말의 목적어가 달라야 했음을 의미했다.

책임진다는 건 뭘까? 무거운 말임에도 굉장히 자주 쓰이는 말이다. 정재계 인사가 사직할 때 쓰기도 하고,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사람에게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쓰기도 한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클리셰 대사이기도 하다. “내가 너를 책임질게.”

나를 책임진다고? 어떻게? ‘책임진다’는 뭐랄까, 재벌가에서 망나니 자식을 보호할 때 쓰는 말처럼 들린다. 내 언행이 야기한 결과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때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돌아오지 않게 막는 일. 이게 내가 생각하는 ‘책임지다’의 정의다. 나의 정의에 따르면 책임지는 일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에게 되묻고 싶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곤>은 낙태죄 합헌 판결이 나고 국가가 가상 기계 IAT를 이용해 모든 가임기 여성의 낙태 시술 여부를 확인하는 상황을 그린 픽션이다. IAT는 낙태 시술 여부를 검사할 뿐인데 검사 결과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은 예상외로 어마어마하다. 배우자가 낙태한 이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부가 부부싸움을 넘어 이혼소송을 하게 되고, 맞벌이 가정에서 육아를 담당한 할머니 세대가 대거 양성 판정을 받으면서 이전 세대 여성이 지탱해온 육아 시스템이 붕괴된다. 젊은 여성은 감옥에 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잠자리를 기피하고 모텔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는 생계가 위태로워진다. IAT가 야기한 혼란에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면, 책임진다는 말을 책임지지 않는 사람과 책임질 자신이 없지만 책임지는 역할로 내몰리는 사람이 보인다.



국가가 주도하는 가스라이팅

국가는 굳이 ‘책임진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국가 차원에서 진행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있다. 책임지지 않는다면 국민이 국가를 믿고 따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는 낙태 정책에 상당히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준다. 낙태죄는 1953년부터 있었지만 국가가 산아 제한 정책을 펼친 1960년대에는 공공기관이 보건소에서 낙태 시술을 진행할 정도로 장려되었다. <곤>에 등장하는 어머니 세대는 보건소에서 낙태 시술을 받았지만 현재는 국가가 주도하는 IAT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으면서 감옥에 가게 된다. 안타까운 점은, 어머니 세대가 양성 판정을 받았는데도 대부분 국가에 항의하는 리액션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 정책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현실에 불합리함을 느끼지만 자신이 생명을 살해한 일 역시 분명한 사실이며 낙태는 죄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쉬이 변하지 않는 까닭이다. 국가 정책 기조가 변화하여 죄인이 되었는데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다면 이거야말로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한 가스라이팅을 한 셈이다.



제 의사도 물어봐 주세요


대한민국에는 ‘모자보건법’이라는 법률이 있다. 임산부와 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하기 위한 법률로, 해당 법률에서는 낙태 허용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② 제1항의 경우에 배우자의 사망ㆍ실종ㆍ행방불명, 그 밖에 부득이한 사유로 동의를 받을 수 없으면 본인의 동의만으로 그 수술을 할 수 있다.
   ③ 제1항의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1번이다. 부모 중 한 사람 이상이 장애가 있는 경우 임신중절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다. 법 조항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14조 1항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장애를 가진 부모는 현실에서 쉽게 중절수술을 권유 받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1번과 반대로 태아가 장애를 가질 경우 중절수술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법률의 목적으로 돌아가보자. 모자보건법의 목적은 임산부와 영유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하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비장애인보다 생활상 불편함이 있겠지만 개인이 출산과 양육을 수행할 의지가 있다면 낙태를 할 이유가 없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주변 사람이 권유해 수술을 받게 된다면 임산부의 정신 건강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법률의 목적에 위반된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이 장애인보다 생활상 불편함은 없지만 건전한 자녀 양육이 불가하다고 판단되면 낙태를 할 자유가 있다. 법에서 명시하는 허용 대상자에 들어가지 않아 출산하게 된다면 임산부와 영유아의 건강은 물론 건전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도모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 역시 법률의 목적에 위반한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 일부 국민에게 원치 않는 책임을 전가한다면 이는 국가가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내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 ‘우리 모두의 일’


2020년까지 존재한 낙태죄가 여성만을 대상으로 했듯 현실에서도 태아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여성만의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곤>에서도 그런 현실을 반영한 장면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여성의 성생활을 향한 보수적인 태도이다. 이전 세대에 비하면 정말 많이, 정말 빠르게 성생활 인식이 변화하고 있지만 속도가 무색할 만큼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순결’과 ‘정조’에 관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작품에서 스무 살 성인이 된 샛별이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보호 대상이다. 연애는 시기상조이고 성과 관련된 얘기는 꺼내기 이르다. IAT 검사가 시행된 이후 배우자가 과거 낙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남성은 일관된 반응을 보인다. ‘배신감’. 배신감의 기저에는 ‘감히’라는 권위의식과 ‘정절’과 관련된 고정관념이 짙게 배어 있다. 자신을 향한 걱정보다 앞서는 배신감이라는 감정 앞에 여성은 또 다른 배신감을 느낀다.


다음은 ‘남 일처럼 생각하는 태도’이다. 임신으로 자기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여성과 달리 남성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노민태는 나샛별이 부탁해 임신중절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지만 병원에 전화해서 알아보는 내용은 수술에 들어가는 비용에 그친다. 수술에 임하는 당사자가 준비해야 할 사항이나 걱정되는 부분까지 물었어야 한다고 의문을 제기한다면, 임신중절수술이 처음인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일까? 나샛별이 수술을 앞두고 수술 이후 자기 삶에 생길 변화를 가늠하는 동안 노민태는 나샛별을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축구 경기를 관람한다. 두 사람 사이 간극은 K리그 2부 예선과 프리미어 리그 결승전만큼 멀어 보인다. 임신과 출산은 남성이 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임신이 야기한 체내외 변화를 똑같이 체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 일이라고 생각한 일이 사실은 자신의 일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일이라고 인식을 전환한다면, 책임진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을 뿐더러 ‘책임지는 행동’의 범위는 지금보다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곤>에는 일관된 뉴스 속보가 컷 중간중간 삽입된다. 집중호우가 계속되면서 댐을 방류한다는 내용이다. 방류수는 500톤에서 1,000톤으로, 그리고 추가 방류를 통해 계속해서 늘어난다. 결국 작품에서 그리는 시간 동안 비는 그치는 않는다. 나는 늘어만 가는 방류수가 불합리한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처럼 보인다. 쌓이고 쌓여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었을 때 세상 밖으로 내놓으면서 불균형한 수위를 조절하고 조금씩 균형을 맞추는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뉴스가 <곤>이 다루는 이야기를 비유하는 장치라고 보았다. 작품 바깥에서 일어나는 현실도 다르지 않다. 여성 인권 향상을 향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낙태죄 폐지 주장이 다시금 힘을 얻게 되었고 용감한 사람들이 꾸준히 투쟁한 결과, 2021년 1월 1일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폐지되었다. 물론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모두가 바란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에 씁쓸함을 남겼지만 투쟁과 결과만으로도 충분히 모두가 자축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법제 변화는 사회 인식 변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여긴 일이 당연하지 않은 일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들겠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이 다시 새로운 당연함이 되는 시간은 그보다는 빠를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말마따나, 우리는 계속 말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작품명: <곤GONE>
작가: 수신지
플랫폼: 카카오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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