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암이 돋보이는 웹툰 4선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쨍하게 내리꽂던 햇살은 선선한 공기 속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로 바뀌었다. 낮이 긴 여름 햇살은 어쩐지 ‘열기’와 ‘에너지’가 연상된다면 가을 햇살은 따스한 빛과 얼굴 위에 번지는 단풍잎 모양 그림자가 연상된다. 가을 바람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쉽게도 가을은 해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가을 햇살과 가을 바람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의 조화도 넉넉히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계절도 짧아진 마당에 코로나 시국도 겹쳐 마음 편히 자연 풍광을 즐기지 못하는
2021년 가을. 여러모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웹툰 속에서 실제에 버금가는 명암을 찾아봤다. 실사처럼 섬세하다 못해 인물의 감정까지 극대화하는, 멋들어진 명암이 돋보이는 작품을 추천한다
[천방지축 아가씨가 사랑으로 물들이는 세계 - <황자님께 입덕합니다>]
<황자님께 입덕합니다>는 말 그대로 덕후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이다. 황자님 덕후인 안젤라는 혼자 몰래 쓴 팬픽이 우연한 계기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황자가 있는 에스페린드 가문의 부름을 받는다. 에스페린드 가문은 이 기회에 황자를 향한 여론을 바꾸고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안젤라에게 팬픽 차기작을 요청하고, 안젤라는 황자가 사는 저택에 머물게 된다. 황자는 덕심을 숨기지 못하고 맴도는 안젤라가 거슬리지만, 안젤라의 순수한 감정은 차갑게 얼어붙은 황자의 마음을 조금씩 녹인다.
태어날 때부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정쟁에 뛰어들어 순수한 호의를 접해보지 못한 황자와 황태자는
천방지축 덕후 아가씨가 벌이는 소동이 점점 유쾌하게 느껴진다. 항상 사회적 가면을 쓰는 생활에 익숙한 두 사람은 조금씩 자기 감정을 내보이고, 정치적 목적 없이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
명암은 딱딱하기만 한 일상에 따뜻하게 번지는 감정을 표현한다. 안젤라에게 호기심을 가질 때, 안젤라에게 위로를 받을 때, 안젤라를 향한 마음을 인정할 때. 황태자와 황자가 마음을 열고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마다 따스한 명암이 감정을 극대화한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올라가는 명암의 디테일도 작품을 보는 묘미이다.
작가: 죽선
플랫폼: 카카오페이지 / 제작사: 엠스토리허브
[창을 투과하는 빛에 배인 풋풋한 감정 - <한 철 어스름>]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 천장에 달린 전등, 책상 위 스탠드 조명 등 방을 구성하는 빛이 있다. 우리는 매일 방에서 눈을 뜨고 감지만 매일 빛을 의식하고 살진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암막 커튼을 들여 일부러 빛을 차단하기도 한다.
<한 철 어스름>은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조명이 뿜는 빛이 자아내는 감성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사 온 첫날, 호수는 방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문이 승우라는 또래 남자아이의 방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하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점점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 각기 다른 이유로 마음 한 켠에 외로움을 품고 사는 호수와 승우는 어느새 서로 외로움을 채우는 존재가 되고, 매일 문이 연결되는 시간만 기다리게 된다.
문이 연결되는 시간은 해가 서서히 지는 오후 시간. 제목처럼 어스름한 시간이 되면 호수와 승우는 마침내 만나고 온전히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사라져가는 햇살 속에 얽히고 설키는 그림자가 두 소년의 풋풋하고 간질간질한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작가: 나뭇
제작사: 북큐브
[낯선 세상을 유영하는 이방인의 복잡한 마음 - <역하렘 게임 속으로 떨어진 모양입니다>]
자신이 읽던 책 또는 게임 속 세상으로 들어가는 빙의 설정은 로맨스판타지 장르에서 흔한 설정이다. 이제 막 빙의한 주인공이 낯선 세상의 문법에 금세 적응하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기존 인물의 불행한 삶을 전복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로판 독자 대부분은 으레 빙의 설정을 클리셰로 여기고 넘어가지만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진다. ‘어떻게 모르는 세상에서 눈을 떴는데 저렇게 빨리 적응하지?’
<역하렘 게임 속으로 떨어진 모양입니다>는 문란하기로 악명 높은 황녀 캐릭터에 빙의한 주인공이 게임 시스템을 이용해 황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빙의 후, 주인공은 기존 황녀 캐릭터와 다른 선택을 하면서 그동안 황녀가 성적 도구로만 대한 남자 캐릭터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간다.
이 작품이 가진 차별점은, 주인공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시각각 고군분투하면서도 자신을 황녀라고 생각하는 주변 시선과 자기 정체성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고 불안해한다는 사실이다. 낯선 세계를 대하는 두려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선 선택의 기로에서 느끼는 망설임,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캐릭터에게 느끼는 안도와 사랑의 감정까지… 복잡다단한 주인공의 심정은 명암을 입고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강조되는 컷에서 특히 세심하게 넣어지는 명암은 주인공 옐드리아 황녀가 느끼는 감정과 작품의 웅장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작가: 이늬(원작)/고야(각색,그림)
플랫폼: 카카오페이지 / 제작사: 다온크리에이티브
[슬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위에 드리우는 빛과 그림자 - <고래별>]
‘전쟁 때도 애는 낳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어떤 험난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이 싹 트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감정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시대 역시 분명 존재한다.
<고래별>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저마다 다른 족쇄와 목표,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대상을 사랑하지만 묵묵히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할 뿐, 누구도 자기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존재는 팍팍하고 서글픈 시대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서사와 연출 이외에도 <고래별>이 가진 특징 중 하나가 수려한 명암이다. 경성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과 붉게 타오르는 노을, 오후에 내리쬐는 햇살을 실사에 가깝게 표현한다. 특히 주인공 수아의 서사는 인어공주를 모티브로 진행되는데, 바다와 물에도 명암이 적용되어 색감이 굉장히 다채롭게 표현된다. 완성도 높은 배경과 명암 덕분에 매 컷이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다.
작가: 나윤희
플랫폼: 네이버웹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