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태 노동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고
알고 있기는 했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닭들이 돼지들이 소들이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다가 괴로운 죽음을 맞이했는지를. 대충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책은 대충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보여줬다.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이 버무려진 르포 형식은 마치 내가 그곳에서 노동을 하고 같이 미쳐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맛있는 고기뿐만 아니라 힘쓰는 고기(인간)들에 대한 삶도 곁들여 모든 고기들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인 삶의 현장을 직접 겪고 온 기분이었다.
*닭의 경우
몇 해 전, 복날을 앞두고 인가, 아빠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괴물을 본 적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케르베로스가 개 세 마리의 머리를 달고 있는 괴물이라면 내가 본 괴물은 천 마리 쯤 되는 닭의 머리를 달고 도로를 쌩쌩 달리는 모습의 괴물이었다. 수천 개의 빨간 눈들이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은 오랜 시간 악몽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책에선 내가 본 복날의 수천 마리 닭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욕심으로 최대 3마리 정도 들어가는 케이지에 5마리의 닭을 꾸겨 넣고, 생산력이 없다는 이유로 수평아리들을 산채로 갈아서 비료로 만들고 잘 크지 않는 닭들은 사료를 축낸다는 이유로 목을 비틀고…. 복날 전에 봤던 그 머리가 수천 개인 닭괴물의 눈동자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악몽처럼 날 따라다녔는지 알 법도 했다.
*돼지의 경우
사실 돼지들은 개만큼이나 똑똑하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에 대한 의존도 정도…. 그런데 우리는 자주 돼지보다는 인간과 친한 개나 고양이의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 우리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이다.
이렇게 지능이 높은 동물인 돼지들에게 비(非)돼지적인 사육환경은 배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마취도 없이 단지 편의나 맛을 위해 행해지는 끔찍한 조치들(이빨 뽑기, 꼬리 자르기 등)을 눈앞에서 본다면, 아 안 먹어요. 소리가 절로 날 것 같았다.
영화 <옥자>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돼지의 경우에 대해서는 추후 <옥자>와 연관시켜 더 자세히 다뤄볼 예정이다.
*개의 경우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하고 친근해 그 정도가 덜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개의 경우가 오히려 가장 충격적이었다. 식용개는 사실상 불법으로, 법이 없으니 따라야 할 기준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차라리 식용개를 합법화해서 제대로 된 제도라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까지 했다. 법망에 구애받지 않고 구매하고 사육할 수 있기 때문에 식용개를 키우는 이들 중 일부는 돈이 더 들 것을 우려해 아예 식용 개를 합법화하는 것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개의 경우는 닭이나 돼지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고 끔찍한 환경에서 사육당하고 있었다. 동시에 모든 맛있는 고기 중 가장 사람을 잘 따르는 동물이기도 했다. 아이러니였다. 이전에 나는 유기견보호센터로 봉사활동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에 왜 어떤 강아지들은 한없이 사랑받는데 어떤 개들은 이렇게 고통받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하다 세상의 부조리가 환멸 나서 울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식용개 사육장에 갔으면 기절했을 것이다.(주인공의 심리변화도 흥미로웠다. 정 주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는 농장주인의 말을 어긴 죄로 그는 인간성 상실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개의 경우에는 적당한 사료 기준이 없어 주로 음식물 쓰레기들을 먹여서 키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때문에 식용개들은 죽을 때까지 맑은 물을 마셔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는 그 부분이 무척 마음 아팠으나 일부 개농장 주인들은 본인들이 개를 이용해 국가의 골칫거리인 짬 처리까지 한다며 뿌듯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 선진국의 경우
(코로나 대응으로만 봐서는 ‘선진국’으로 불러주기도 싫지만 확실히 동물복지 측면에서는 선진국인) 몇몇 국가들의 경우 산란계 배터리 케이지 금지, 돼지들에게 의무적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구비, 돼지들의 목욕을 위한 진흙 수렁 제공, 돼지스톨 금지 등등 본받을 만한 것이 많았다. 개의 경우엔 식용하는 국가가 거의 없다 보니 관련 법률이 없었다.
힘쓰는 고기 중 약한 고기들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묘사는 수준급 비꼬기였다. 특히 같은 힘쓰는 고기의 입장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세세하게 다룬다. 또 사업주들이 법망을 피해 얼마나 교묘하게 그들을 차별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책에서 묘사한 법은 늘 약자를 피해 간다. 온전히 강자의 편이다. 근로기준법은 농축산업 종사자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가진 자들이 힘쓰는 고기들을 피부색 별로 나눠놓고 서로 다르게 대우하는 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간혹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차별적으로 보수를 지급하지 않는 공평한(?) 농장도 있었지만 작가의 눈에는 이미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농축산업의 경우 그러한 공평함조차도 사실은 그저 우습게만 보인다.
이렇게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에서는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임금 차이는 없지 않냐고. 그런 지적도 물론 타당하지만 내 해석은 이렇다. 이제 한국인들은 이런 지방의 외딴 농장에서 일하지 않는다. (중략) 나 같은 30에 한국인이 이런 농장에서 일하는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따라서 이 경우는 태국인이 한국인과 같은 월급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태국인과 같은 월급을 받았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주로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책에서 여성의 처지를 비유한 -아주 짧게 스쳐가는- 대목에서 나는 작가가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컨트리클럽이었다. (중략) 골프장에선 풍채 좋은 중년 남자들이 그림처럼 펼쳐진 코스 위를 거닐고 있었다. 그들 뒤를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여자들이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다녔다. 남녀 간의 가사 분담 비율을 표현한 병적인 행위 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공장식 농장 속 동물의 생활과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현장을 읽고 있다 보면 이 모든 고기들이 하나의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상품가치가 없는 맛있는 고기들은 가차 없이 목이 비틀리거나 맞아서 죽음을 맞이했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피부색이 달라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힘쓰는 고기들은 다른 고기들에 비해 돈을 적게 받았다. 쓸모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모습은 맛있는 고기든 힘쓰는 고기든 모두 같았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선언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쓸모보다 존재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사르트르는 힘쓰는 고기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나는 모든 고기들에게 그 적용 범위를 넓혀 생각하겠다.) 그러나 그러한가? 자본주의 논리가 당연시되는 오늘날에는 사르트르의 그 발언은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닭, 돼지, 개를 사육하고 유통하고 또 이방 나라에서 온 힘쓰는 고기를 차별하는 사람들이 절대적인 악(惡)인가 하면 그렇게 보기도 애매하다. 책에는 내 머리를 세게 때린 구절이 하나 있었다.
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중략)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중략) 사람들에게 그들의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입을 삐죽거리고 속으로는 딴소리를 할지언정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센 항의가 터져 나온다. 뒤틀리고 날이 서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악해 보였던 농장 사장이 (돈 때문이지만) 오히려 돼지를 때리지 않고, 사람 좋고 정과 의리가 넘치는 사장이 (인간들의 힘듦을 덜어주기 위해서) 돼지를 때리는 아이러니를 보며 과연 절대적인 선과 악이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 장면 외에도 사람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입체적일 수 있나? 싶은 대목들이 자주 등장한다. 젊을 땐 민주투사였던 인물이 어른이 되어서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된 개장수 노릇도 ‘마다하지 않고 하는 성실한’ (개들에게는 아마 악마나 다름없을) 모습이나 처음에는 개들에게 정을 주고 후에는 혐오하게 되었던 주인공의 모습들이 그렇다. 그렇게 다양한 면을 가진 그들을 무작정 비난하기에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누군가에겐 괴물이 된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나름의 결론을 짓는다.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중략)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성찰과 사유를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의심하지 않는 인간은 괴물일 뿐인 것이다. 단지 작가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의심은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는 그런 자본주의식 합리적 의심이 아니라 무엇이 선(善)인지 무엇이 자연의 섭리에서 합리적인지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과 같은 상황에서는 무엇을 의심해야 하나, 생각해보자면 과연 힘쓰는 고기가 현재의 맛있는 고기의 처지가 되었을 때도 이것이 최선(最善)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책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영화 <템플 그랜딘>에서 다룬 윤리적인 사육방식의 시도가 이러한 의심과 성찰, 고민 끝에 나온 바람직하고 건강한 방향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소의 입장이 되어 더 나은 방향의 사육을 고민하고 도축되는 순간까지의 삶을 보듬어주는 가축시설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지어 단순한 영화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실화'이다.
그러니, 희망적인 것은, 우리들은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의심하고 최선의 옳은 방향으로 행동하다 보면 세상에 괴물보다 인간의 비율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 동물복지란 사러 가야지.
+덧.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매체의 문제점
우리나라 매체에서 채식주의는 마치 하나의 병이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종종 치부되곤 한다. 실제로 모 프로그램에서는 채식을 지향한다는 한 패널을 보고 “야채만 먹다니 미친 거 아니야?”와 같은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든가 한국에 온 외국인 채식주의자 패널이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마치 서바이벌 미션처럼 묘사해 오락적으로 소비하기도 하였다.
누군가에게 동물복지를 강조하며 채식을 강요하는 것은 분명 불편한 일이겠지만 그보다도 채식주의자나 동물복지를 위해 힘쓰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전체에 퍼져있는 부정적인 시각들-유별나다는 등-이야말로 정말 불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