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불 Mar 27. 2020

서른 즈음의 참상과 환상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김애란 소설, <비행운> 중 '서른'에 관하여.


*전체 줄거리는 하단에 있습니다.

     

  “엄마, 난 32살이 되면 결혼할 거야.” 내가 엄마에게 자주 하곤 했던 말이다. 왜 하필이면 서른두 살이야? 엄마는 되물어 오곤 했다. 그때쯤이면 안정된 상태의 내가 있을 거야,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직장도 자리 잡고 인간관계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을 것이라고. 아직 가시지 않은 젊음의 생기와 원숙미가 공존하는 과도기적인 그 나이가 매력적이었다. 막연하게 동경해오던 삼십 대였다. 작가는 그랬던 내게, 서른의 참상을 보여주었다.

  왜 하필이면 제목이 ‘서른’일까? 아마 정확히 ‘서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기보다는 서른, 삼십 대가 지닌 사회적인 나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던 때 비록 나이는 겨우 한 살이 더 늘어났을 뿐이었지만 사회적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서른이라는 나이 역시 일종의 책임감이 더 막중해지는 그런 나이, 진짜 ‘어른’의 길로 들어가는 나이일 것이다. 청춘이 가버리고 행하는 일들이 과정이 아닌 결과가 되어버린 나이. 그런 서른 언저리의 나이 때인 세대들을 겨냥한 이야기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글은 주인공 ‘나’가 10년 전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 답장을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른」은 한 개인의 윤리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자본주의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깊고 애절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이 울림은 「서른」이 편지 형식을 취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다. 「서른」의 비범함은 무엇보다 서간체 형식의 특성을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와 노동의 성격을 심층적으로 탐사하는 데 걸맞게 구사한 데 있다. 일견 소품처럼 보이는 「서른」은 이런 점에서 대담한 발상의 작품이다.
-한기욱, 「우리 시대의 「객지」들_ 황석영과 김애란 소설의 현재성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 2013, 235쪽


  위 논문은 이 소설이 서간체인 것이 개인의 윤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현실의 핵심을 찌르는 애절한 울림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나 역시  편지 형식으로 된 이 글을 읽으며 주인공의 우울한 참회록, 반성문을 읽는 듯한 느낌과 이 현실에 대한 담담한 고발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일 편지 형식이 아니라 대화나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를 서술했다면 이렇게 고백적으로 이 글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독백체로 글을 풀어 나갔다면 주인공의 감정 겨운 하소연으로 글이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편지 형식을 취함으로써 비대면성이 낳을 수 있는 진솔함을 끌어내고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세계에 젖어 감상적으로 글을 써나가는 것을 경계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언니가 '나'에게 보낸 엽서와 내용물을 언급하며 시작되고 글의 끝 무렵에서 역시 언니가 내게 보낸 엽서와 내용물에 대해 언급하며 끝맺는다. 소설을 읽으며 언니가 내게 준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읽어 내려가야 했다.


  편지의 서막에서 주인공은 서울에서 구한 여섯 번째 자취방에서 공책만 한 창밖을 바라보며 ‘예쁜 서울’의 모습을 묘사한다. 아파트의 네온등을 보며 자신의 방이 현실과는 동떨어져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또한 책을 세 번 정도 읽고 나서 앞서 그녀가 표현한 ‘깨물어 먹고 싶을 만큼, 예쁜 서울’이라는 것은 반어법, 현실에 대한 비아냥 정도로 해석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어떤 일이 그녀를 도피적이고 꼬인 존재로 만든 것일까. J대 불문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주인공은 그간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휴대전화마저 없애버리게 한 그 ‘사정’에 대해 풀어나간다. 담담한 말투인 듯 보이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이 얘길 언니에게 밖에 할 수 없어 편지를 써요. 다 써놓고 끝끝내 부치지 못할지라도. 오늘 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같은 대목에서 그녀가 얼마나 내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20대 때 했던 여러 아르바이트들을 나열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면목동 학원에서 일어났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였다. 천사 같은 얼굴로 담배 냄새를 풍기며 자신을 따랐던 제자, 그 제자로 인해 가슴 한쪽에 슬며시 온기가 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 이 대목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소설이 나를 그토록 깊은 우울로 몰고 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다시 한번 보고 나서야 그 학원에서의 장면들을 왜 그토록 상세히 적어놓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읽었었을 때 따뜻하고 웃음 짓게 하는 대목이었다면 같은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읽을 때는 한 없이 먹먹하고 우울한 대목이었다. 과거에 그렇게 맑은 아이들을 보며 웃음 지었던 주인공 역시 서른이 된 이제는 생각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아래부터는 책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눈 뜨고 보니 좀 더 나쁜 채무자가 되어버렸다는 ‘나’는 한창 가세가 기울던 중 전 남자 친구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열심히 논문 쓰다가 빚을 안고 헤어지게 된 전 남자 친구는 멀끔한 모습으로 ‘나’의 눈앞에 나타난다. “살아보니 사람이 제일 큰 재산인 거 같더라.”는 남자 친구의 말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말이었다. 그는 그녀를 정말 재산으로 여긴다. 그의 권유로 입사하게 된 회사는 다단계 회사였다. 사람이 재산인 회사.

  ‘열심히 하면 된다.’는 강연자의 말에 혹하게 된 그녀는 결국 그곳에 입사를 하게 된다. 주인공과는 다르게 어릴 적 나의 엄마는 내게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지혜로워야 해.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는 레이더를 세우고 다니렴.’하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하셨다. 엄마가 다단계와 같은 것에 데었는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엄마 말씀이 맞다는 것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의 순수한 열정과 절박함을 악용하는 이 사회에 환멸이 느껴졌다. 배고픔에 간식을 요구하던 순수하고 가난한 청년을 그렇게 만든 이 사회가 미웠다. 세상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물 초반 낭만주의자인 나에게 이 소설은 너무도 버겁고 힘겨웠다.


  입사한 후 들어간 합숙소 신발장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두 번째로 읽었을 때에야 그것이 도망을 못 가게 잡아놓는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공포영화의 반전처럼 내 뇌리에 남아 한동안 가위눌림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합숙소에서 그녀가 겪은 생활은 정말 감옥이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파투 나고 꿀꿀이죽 같은 식사를 하며 아침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자신을 둔갑해야 하는,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합숙소 창문에 쇠창살이 달려있다는 묘사는 이런 감옥 같은 합숙소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리라.

  ‘제가 팔고 있던 건 사람이었어요, 언니. 그런데도 저는 끝까지 그 일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려 애썼어요.’ 어떤 절박함이길래 이토록 사람의 눈을 흐려지게 만들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들은 대체 얼마나 아프고 절박해야 들 수 있을까.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으로 나라가 아파할 때, 고3 입시를 앞두고 있던 나는 개인적으로도 밀려오는 자괴감과 절망감에 그들의 고통을 공유하기 버거워했다. 지금 회상하니 많이 부끄럽지만, 당시의 나는 나대로 충분히 힘들고 괴로웠으니까, 라는 이유로 그들을 외면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내가 치유된 후에야 그들의 아픔이 보이고 그들과 함께 목소리 낼 힘이 생겼었다.  내 아픔들을 극복하고 치유하고 나서야 더 큰 이해심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직 병든 상태일까, 아니면 극복하고 나아갈 여지가 있는 사람일까. 김애란의 소설이라면 병든 상태로 주인공을 쭉 방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소설을 끝까지 읽고 판단할 일이었다.


  내용을 이어서 보자면 ‘나’는 과거에 자신의 맘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제자 혜미에게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혜미가 보낸 문자 메시지들은 혜미의 순수함과 따뜻함을 더욱 부각한다. 그러나 옛 제자에게 그토록 맑은 문자를 받은 주인공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만다. 자신의 옛 제자 혜미를 회사에 입사시키고 본인은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그 부분에서 답답하니 참고 있던 울음이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다. 혜미에 대한 동정 때문이기도 했고 그 일을 꾸역꾸역 편지 위에 고백해내는 ‘나’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화제를 바꾸어 1년 동안 20만 원어치 빵을 먹어 만 원가량 적립금이 쌓인 마일리지 카드 이야기를 언니에게 주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언니가 보낸 선물에는 10년 전 누군가 빵집 카드 위에 또박또박 적어놓은 ‘나’의 이름이 있었다. 아마 그 누군가는 본인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카드 위에 적힌 그녀의 이름은 10년 전 순수했던, 가슴 한쪽에 슬며시 퍼지는 온기를 느낄 여유가 있던 ‘나’의 모습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또한 책을 세 번 읽는 내내 의문이었던 언니에게 받았던 정체모를 ‘선물.’ 선물에 대한 의견은 나와 친구들 사이에 분분했다. 그 선물은 바로 마일리지로 산 케이크 일 것이다, 아니다, 선물은 애당초 마일리지 카드밖에 없었다 등 여러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한 것은 물리적인 선물이 무엇이든 간에 주인공 ‘나’가 순수하고 인간적이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돌려받았다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주인공이 끌어들인 회사에 입사한 혜미는 자살시도 끝에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혜미의 근황을 전하며 주인공은 혜미의 성품을 잘 드러낼 수 있던 경험들을 회상한다. 혜미의 착한 마음과 자신을 각별히 생각하던 마음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망가진 인간성의 회복을 암시하는 구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글의 마지막, ‘만일 언니가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 제가 혜미가 있는 병원에 찾아갔다는 뜻일 거예요.’라는 대목을 통해 그녀가 혜미에게 찾아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 ‘나’의 정신적인 회복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혜미의 삶 또한 너무도 안타까웠지만 주인공의 회복으로 인해 혜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겠구나, 하고 작은 희망을 갖게 해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제가 오늘 언니에게 무얼 받았는지 전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써요.’ 앞서 말했듯 그녀가 언니에게 받은 것은 물리적인 선물이라기보다는 세상에 상처 받지 않아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 글이 서른 언저리에 있는 이들의 우울한 참회록, 또 차가운 현실에 대한 고발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옅게나마 전망을 제시한 부분에 있어서는 서른의 참상을 전해 듣고 없어질 뻔했던 내‘서른 환상’을 지켜준 작가에게 굉장한 감사의 맘을 전하고 싶다.




참고문헌

     

김애란,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한기욱, 「우리 시대의 「객지」들_ 황석영과 김애란 소설의 현재성에 대하여」, 창작과 비평, 2013


「서른」 줄거리


  주인공 ‘나’는 10년 전 사임당 독서실에서 알고 지내던 ‘언니’에게 엽서를 받고 그에 대한 답장을 쓴다. 서울에서 구한 자취방에서 공책만 한 창 밖 속 서울 풍경을 ‘아름답다.’고 묘사하며 주인공은 언니를 회상한다. ‘나’는 언니에게 보내는 답장에 J대 불문과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자신의 10년간의 이야기를 적어 나간다. 주인공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면목동 학원에서 만났던 혜미에 대해서도 적는다. 몇 년 뒤 가세가 기울던 중 ‘나’는 전 남자 친구의 소개로 한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선진국형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을 한다는 그 회사의 합숙소 신발장에는 자물쇠가 걸려있다. 휴대폰까지 압수당한 그녀는 모든 지인들의 신상정보를 밝히고 물건을 판매하도록 강요받는다. 물건이 아닌 사람을 파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그녀는 연락해온 옛 제자 혜미를 그 회사에 입사시키고 가까스로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그러나 언니로부터 과거에 자신이 선물로 주었던 뚜레쥬르 마일리지 카드와 우편물을 되돌려 받으며 ‘나’는 왈칵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한다. 혜미는 ‘나’에게 몇 번이고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을 하지만 ‘나’는 혜미가 해맑은 미소로 세상과 ‘맞짱’ 뜨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버리며 혜미의 연락을 무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혜미가 자살시도를 해서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는 언니에게 언니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자신이 혜미에게 찾아갔다는 뜻일 것이라고 한다.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편지를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학, 세상을 씻어주는 눈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