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삼계탕집에서 긴 시간 대기하고 영접한 삼계탕 국물을 한 입 넣은 순간, 나는 크게 실망했다. 몸이 허하다 싶을 때 제일 먼저 챙겨 먹는 음식이 삼계탕인데 먹을 때마다 만족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전복이 들어가나, 산삼이 들어가나, 다 그저 그런 맛이야.”
“국물이 진국이고만. 제발 넌 까탈 좀 내지 마라.”
“아냐. 살도 퍽퍽하고 뭔가 깊은 맛이 없어. 왜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이 안 날까.”
어린 시절, 나는 봄이 되면 초등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사 왔다. 어느 때는 이틀 만에 하늘로 보내고 5일을 울었다. 어느 때는 중닭까지 잘 크다가 죽어서, 학교도 안 가고 울었다. 한 번만 더 사 오면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 협박도 듣고, 등짝도 맞았지만, 소용없었다.
봄만 되면 학교 앞 노점, 박스에 담긴 보송보송 솜털 병아리에 마음을 빼앗겨 중독처럼 사 오곤 했다.
어느 해, 봄에 사 온 세 마리의 병아리가 중닭을 지나 수탉이 되어가고 있었다.
먹성이 어찌나 좋은지 일주일이 멀다고 도매시장에 가서 닭 사료를 사 왔다. 나날이 힘이 세진 수탉 세 마리는, 판자로 만들어 놓은 엉성한 닭장을 부수고 나오기 일쑤였다. 모이 주러 닭장 문을 열었다가, 세 마리가 일제히 달려들어, 뒤꿈치를 쪼아대는 바람에, 피를 본 적도 있었다. 쓰리 닭은 점점 말썽쟁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닭장 손보는데 지친 아빠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1980년대만 해도 대문밖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었다. 아빠는 쓰레기가 비워지면 쓰리 닭을 거기서 키우자고 하셨다. 튼튼해서 부서질 걱정 없고, 공간이 넓어 자유롭게 놀 수 있으며, 모이 줄 때 탈출 할 수 없을 만큼 깊어서 안전하다는 이유였다. 쓰레기통 앞에 ‘자유네 닭장’이라고 크게 써 붙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집에 돌아왔다. 집에는 큰엄마와 사촌들이 놀러 와 있었고 집안에는 진한 고깃국 냄새가 그득했다.
“엄마! 오늘 무슨 날이야? 아, 맛있는 냄새. 나 배고파, 배고파.”
“복날이라 큰집 식구들이랑 닭백숙 먹을 거야. 얼굴 땟국물 좀 봐. 얼른 씻고 상에 수저 좀 놔.”
부리나케 세수하고 부엌으로 갔다. 커다란 솥단지에서 뽀얀 국물이 넘실넘실 끓고 있었다. 수저를 놓고 김치와 소금을 받아 상에 올리고 군침을 삼키며 자리 잡고 앉았다.
엄마가 푹 삶아진 고운 자태의 백숙을 내오셨다. 큰엄마가 양쪽 닭다리를 쭉 잡아 뜯어 아빠와 나에게 건넸다. 몇 개 없는 닭다리를 나는 막내딸이라는 특권으로 먼저 맛볼 수 있었다. 맛이 기가 막혔다. 쫄깃하고 부드러워 씹지도 않았는데 입 안에서 녹아 버렸다. 국물 맛은 또 어떻고. 채소만 넣고 끓였다는데 어찌나 진하고 구수한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정신없이 먹었다.
“엄마, 진짜 맛있다. 몇 마리야. 닭다리 또 있어?”
“어? 어. 세 마리. 닭다리 없어. 다른 거 먹어.”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는 엄마를 보자, ‘세 마리?’가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 쓰레기통으로 달려갔다. 닭이 없었다. 가슴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닭, 닭! 어디 갔어? 어? 내가 먹은 게 우리 닭이야?”
“그게 말이야. 새벽에 청소 아저씨가 쓰레긴 줄 알고... 아침에 보니 다 죽었더라고...”
“말도 안 돼! 내 닭 살려 내. 당장 아저씨들한테 물어내라고 해.” 울면서 소리쳤다.
엄마는 그만하라며 나가시더니 언제 끓였는지 닭죽을 가져와 가족들에게 한 그릇씩 퍼 담아 주셨다.
“운다고 죽은 닭이 살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만 울고 우선 먹기나 해.”
눈물 떨어진 닭죽을 마지못해 한 입 넣었다. 찹쌀 넣고 부드럽게 끓인 닭죽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눈물이 계속 흘렀지만, 속도 없이 나는 한 그릇 더 먹었다.
“왜, 왜! 그 맛이 안 나는 거야? 그때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
여전히 청소 아저씨들의 소행인지 엄마의 단독 범행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온 가족이 모여 뜯었던 쓰리 닭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게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