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2학년이던 그때는 짝퉁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가난한 시대였고, 대부분이 서민이었고, 브랜드보다 비메이커를 더 많이 갖고 있던 시절이었다.
시험 마지막 날엔 친구들과 동시 상영하는삼류 극장에 가거나 동네 만화방에 갔다.
돈이 좀 생기면 지하철을 타고 시내 극장(단성사, 피카디리)이나 남대문 시장을 어슬렁댔다.
시험을 마치고 그날도 단짝 친구 세 명과 학교 앞 단골 떡볶이집에서 볶음밥까지 박박 긁어먹은 후 남대문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아이템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줄 것인지 설렘으로 가득 찼다.
남대문 시장은 주머니 사정이 얄팍한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한창 멋 내고 싶고 갖고 싶은 게 많은 나이, 남대문은 싸고 예쁜 물건이 많아서 돈이 좀 생겼다 싶으면 들르는 참새 방앗간이었다. 세상 별의별 짝퉁들이 다 모여 있어서 아이쇼핑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꺄~
웬욜~
대충 펴놓은 자리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갖가지 짝퉁 농구화들이 보였다.
나이스, 아디더스, 르까퍼, 프로를 뺀 그냥 스펙스...
이게 웬 떡! 내-복도 있었다.
당시,
이종원의 화려한 의자 춤사위로 남, 여학생은 물론 할머니 내-복 패러디까지 불러일으킬 만큼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리복은 비싸서 아무나 갖지 못하는 꿈의 농구화였다.
쥔장 아저씨는 손바닥과 발바닥을 현란한 박자에 맞춰"발만 들어가면 무조건 천 원! 천 원!" 외쳤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앉아 가장 진퉁처럼 보이는 리복 농구화 고르느라 눈에 불을 켰다.
하지만, 사이즈가 없거나, 있으면 불량이거나, 짝퉁 티가 너무 나거나, 그랬다.
대박 소득의 주인공은 h였다.
다음날,
당연히 내-복을 외치며 들어올 줄 알았던 h는 낡은 운동화 그대로였다.모두 의아해 모여들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