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복이 많은 사람일까.
아님, 일을 만들어서 하는 사람일까.
부모님 하시는 가게 일을 틈이 날 때마다 거들었다. 언니가 셋이나 있는데도 집안일도 가장 많이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다.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이 집 막내딸은 똥도 버리기 아깝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직장에서도 그랬다. 서비스 직종에 있다 보니
고객이 갑자기 몰리면 정시 퇴근이 어려웠다. 교대 근무자가 와도 어수선한 상황을 끝내놓고 가야 직성이 풀렸다. 두세 시간쯤 더 일하다 퇴근하는 일이 빈번했다. 몸은 고돼도 그래야 맘이 편했다.
오늘도 열일했다는 뿌듯함. 힘은 들어도 일이 좋았고 재밌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덕분인지 동기들보다 빨리 승진했다. 하지만 잘하고 싶은 욕심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매일 일에 치여 살았다. 일주일 중 5일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일하고 휴일 하루는 꼬박 자고 하루는 신나게 놀면서 충전했다. 그래야 다음 한 주를 버틸 수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많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한 번 빠지면 싫증 날 때까지 한다. 안 좋은 점은 단시간에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어 싫증 날 때쯤엔 반실신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여행이 그렇다. 무리하게 일정을 짜고 몸을 혹사하며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애들이 좀 더 클 때까지 다시는 가지 말자, 다짐하지만, 어느새 새로운 곳을 찜하고 또다시 짐을 싼다.
아이 학교에서 하는 봉사, 행사, 동아리 등
학부모회에서 도와달라고 연락이 오면 만성 피로에
시간에 쫓겨 버둥대면서도 거절 못 하고 참여한다. 할 사람 없으니 연락이 왔겠지 싶어 힘들어도 나가는 게 속 편하다.
작년. 재학 중인 사이버대 문창과 학과
대표 제의가 들어왔다. 편입해 1년밖에 다니지 않아 아는 것도 없고 아이들이 어려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긴 시간 설득하며 도와달라는 전 대표의 부탁을 끝내 거절할 수 없었다. 안 하면 모를까 시작하면 작은 거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사람인지라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다. 열정 과다였을까. 임기가 끝난 2023년 새해, 번아웃이 왔다.
내가 사랑하는 봄이 왔지만, 별 감흥도 없고 권태와 무기력, 불면증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버킷 리스트에 올려 두었던 아이돌 댄스를 시작했다. 숨만 쉬며 살다 몇 년 만에 격렬하고 파워풀한 운동을 하니 좀 살 것 같았다.(거의 막춤에 가깝지만) 중간고사 기간이 되어 운동을 열흘 쉬고 다시 나간 첫날, 춤으로 활력을 되찾으리라 다짐하던 나의 의지는 무리한 동작으로 허리 디스크 재발과 급성 어깨 염증이 왔다. 당분간, 댄스는 금지. 수강 기간을 연장해야 했다.
병원서 근육 염증 주사와 물리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친한 S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텃밭을 하고 싶은데 처음이라 혼자는 힘들 것 같다며 반 나눠서 하자고 했다. 애들이랑 같이 심고 수확하면 재밌고 좋을 것 같다고. 돈을 이체하고 나서야 어깨와 허리가 걱정됐다.
어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텃밭 위치 보러 간 김에 아예 모종을 사서 심었다. 의사가 절대 허리 굽히지 말라고 했기에 꼿꼿한 자세로 심으려니 온몸이 마비가 올 것 같았다. 하필 비까지 와서 S 엄마가 고생이 많았다. 고맙고 참 미안했다. 맛있는 점심을 사준다고 해도 얼큰한 칼국수면 된다는 말에 나중에 우리 채소도 마음껏 따먹으라고 말해주었다. 상추, 부추, 셀러리, 대파, 방울토마토, 양배추, 아욱을 심고 두세 가지 더 심을 수 있는 공간은 아이들을 위해 남겨 두었다.
비를 맞은 탓인지 노동을 한 탓인지 밤이 되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허리는 더 욱신거렸다. 비록 작은 텃밭이지만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을까, S 엄마 신세만 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하지만 안 하면 모를까 나는 시작하면 후회 없이 과감하다. 심었으니 당분간은 걱정하지 말자. 일복이 넘쳐 농사복까지 만드는 나란 사람, 참 고생을 사서 한다 사서해.(친정엄마가 내 귀에 피가 철철 나도록 하시는 말씀이다.)
태생인지 성향인지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온걸.
전기장판에라도 허리를 좀 지져야겠다. 간만에 제대로 곯아떨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