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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6.

by 이글로

"희석된 악몽……이라구요?"

[에…… 제대로 설명하려면 처음 이 가설을 세우게 된 계기와 출발점부터 이야기해야겠지만…… 그러려면 이 밤을 다 새도 모자랄지도 모르니 최대한 간단하게 간추려서 설명하겠네. 뭐, 그래도 짧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대순환을 따르는 존재들에게 있어 전생(前生)의 기억은 삭제시키는 것이 제 1원칙일세. 그리고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에 한해 봉인하는 것이 제 2원칙이지.]

"그렇죠."

[삭제의 원칙이야 아직까지 예외 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제쳐두고,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은 봉인의 원칙이라네. 자네는 기억 누적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알고 있나?]

"전생의 기억을 보존한 상태에서 새로운 삶의 기억을 더했을 때,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를 탐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죠."

[그렇지. 하나의 생이 근원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기간. 그동안 쌓은 지식과 깨달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양이 방대하다네. 그리고 통상적으로, 지식이라는 건 중첩될수록 새로운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곤 하지.]

"그거야 이쪽 세계의 역사에서도 증명된 사례가 많으니까요. 현대에 이룩해놓은 수많은 기술적 결과물도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에 누군가 이룩했던 지식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맞는 말이야.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과거로부터 전해온 '지식'을 보다 빠르게 습득함으로써 그쪽 세계는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거든. 하지만 말이야. '깨달음'이라는 건 어떤 느낌인가?]

"저는 학자가 아니니까 뭐라 설명을 드릴 수가 없네요. 개념 상으로 차이가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눈치로 미루어보건대, 깨달음은 지식과 달리 누적됐을 때의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비슷하다네. 즉, '깨달음의 누적'이라는 건 사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종의 모험인 셈이야. 지식과는 속성이 다르니까.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지금의 프로젝트라네. 전체가 아닌 일부만 선발해서 우선적으로 시행하게 된 거지. 에…… 제대로였다면 진작에 1차적인 성과를 점검하고 적용 범위를 확대했어야 했겠지만, 의도치 않게 돌연변이 문제가 발생하면서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네. 그 때문에 이상 현상에 대한 모든 것이 가설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고. 자네가 맡고 있는 케이스처럼 말이야.]


돌연변이 이야기가 나오자 지홍의 표정이 팍 일그러진다. 그가 지금과 같은 임무를 맡아 수행한 것도 벌써 수십 번을 넘어가지만, 최근 들어 자꾸 순탄치 않게 흘러가는 것은 모두 돌연변이 문제가 발생한 이후부터였으니까. 노인의 설명을 듣자 전체적인 큰 그림이 그려진다.


"뭐, 나름의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설명을 듣고 보니 돌연변이라는 놈들이 어떤 식으로 저한테 엿을 먹였는지 알 것도 같군요."

[예전에 비하면 성질이 많이 죽은 것 같구먼. 아주 좋은 현상이야.]

"하……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선생님."

[이런, 원론적인 부분을 설명하다 보니 잠시 이야기가 딴 데로 새 버렸구먼. 아무튼 내가 말해주고자 하는 가설의 핵심은 이걸세. 자, 여기 전생의 기억을 누적시키려는 대상이 있다고 해보세. 당연하겠지만 이들의 전생 기억은 삭제해서는 안 되지. 그래서 봉인을 하게 되는 건데, 애초에 이 기억 봉인이라는 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거든.]

"그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건 아냐. 완전하게 봉인하는 건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삭제하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겠나? 완전 봉인을 풀려면 그 대상을 다시 근원계로 불러들여야 하고, 그러려면 봉인 주기와 깨어나는 시기를 체크하는 일에도 인원을 할당해야 하지. 일 자체는 별로 비중이 크진 않지만, 전담 연구원을 붙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상당한 손실이라네.]

"그렇다면…… 스스로 봉인을 해제할 가능성이 있도록 일부러 여지를 남긴다는 말씀이군요."

[큰 그림에서 보자면 그렇다네. 적절한 시기에 '깨어날' 수 있도록 시술을 한다지만, 어찌 됐건 불완전한 시술이다 보니 변수나 리스크가 생길 수밖에 없어. 각 개체마다 갖고 있는 특성 말이야.]

"특성이라 하심은……?"

[자네도 알다시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살면서 '잊지 못할 기억'이라는 게 생기는 일은 흔하다네. 개개인의 기억까지 우리가 컨트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각인된 기억이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희미해지다 보면 왜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정말 인상 깊게 새겨진 기억은 뚜렷하게 오랫동안 지속되곤 하지. 이건 대순환을 통해 확보한 생의 기억들을 살피다 보면 꽤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라네.]


거기까지 듣자, 지홍은 불현듯 깨닫는 바가 있었다. 노인이 말하고자 하는 가설이 무엇인지, '희석된 악몽'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만의 가설이 순간 만들어진 것이다.


"너무 강하게 각인된 기억이 다음 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기억의 내용은 개체마다 다를 테니 그게 곧 특성이 되겠군요.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렇지. 역시 똘똘하단 말이야. 뭐, 논리 중간에 아직 확인되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아직까지 가설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정도 불완전성은 감수하고 듣게나. 기억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개체의 성향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네. 어떤 개체는 좋은 기억을 더 잘 새기기도 하고, 또 어떤 개체는 아픈 기억을 더 잘 새기기도 하지. 자, 이제부터가 중요하네. 자네가 맡고 있는 케이스를 떠올리면서 들어보게나.]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던 적절한 타이밍에 이론 설명이 끝났다. 지홍은 잽싸게 최근 휘영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간다.


[만약 아픈 기억을 더 잘 새기는 개체가 어느 생에선가 매우 부정적인 경험을 했다고 하세. 그런데 이 개체가 기억 누적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선발됐고, 전생의 기억이 불완전하게 봉인된 상태야. 이때 강력하게 각인된 나쁜 기억이 봉인의 틈을 비집고 나온다면? 그것이 지금 생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세. 게다가 그 개체는 제대로 깨어날 시기도 놓친 상태라고 했잖나?]


잔뜩 기대했건만 대번에 이야기가 생각보다 깊이 있게 흘러가자 골치가 아파온다. 지홍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와인잔을 집어 들어 한 모금을 마신 뒤 머리를 굴려보기 시작했다. 가상의 공간 속에 지금껏 들은 가설을 펼쳐놓고 그 안에 휘영의 이야기를 대입해본다.


- 사실 : 기억 누적 프로젝트의 선발 대상 중 하나.

- 가설 : 부정적인 기억이 더 잘 새겨지는 개체. 어느 생에선가 각인된 '공포'와 관련된 기억.

- 사실 : 살기, 적대감 등 '무질서'와 관련된 대상을 접했을 때의 불수의 반응.

- 가설 : 봉인된 기억 중 극도의 공포와 관련된 것이 새어 나왔기 때문……?


[내 가설을 바탕으로 그 경찰 아가씨에 관한 또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자면 이렇네. 과거 생의 기억 중 극심한 공포를 느낄 만한 것이 있었다고 해보세. 그 기억을 심어준 주체가 아마 범죄자와 같은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자라고 하면 어떨까? 얼추 퍼즐이 맞춰지지 않나?]

"만약 그렇다면 현 생에서의 심리상담 같은 걸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흠…… 꼭 그런 건 아니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게 꼭 전생의 이야기라고만 볼 수는 없으니까. 프로필대로라면 이번 생에서도 벌써 30년 정도 살아왔다고 알고 있는데.]

"하지만 '희석된 악몽'이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그건 가설이라니까. 이거, 내가 알던 자네와는 참 다른 모습이구먼. 일단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들이박아본 뒤에 안 되면 다음 길을 찾는 스타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군요. 괜한 걱정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뭐부터 해야 할지 계획이 그려집니다. 간단한 조언이라도 구할까 했는데 졸지에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홀홀홀, 확실히 성격이 많이 변하긴 변했어. 신경 쓰지 말게나. 나 혼자서 파고드는 공부도 좋지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부가 되는 법이라네.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 주게. 오랜만에 옛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니 그것도 재미지구만.]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쉬세요."






이리저리 얽혀 있는 주택가. 대부분 단층집이고, 이따금씩 이층 집이 한두 채씩 있는 동네. 집들 사이로 골목길과 계단이 마구잡이로 뻗어있다. 누군가를 쫓기엔 퍽이나 까다로운 구조. 재한과 휘영은 도망치는 핏빛 아지랑이의 뒤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 한 발 먼저 도착해있던 진우가 손을 흔들어 방향을 알린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요."

"하…… 새끼, 도망가는 법도 잘 아네. 은 형사, 혹시 지금 보이는 거 있어?"

"아뇨, 안 보이네요. 동네 크기를 보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투시 같은 건 안 되나 봐요."

"뭐, 상관없지. 너무 은 형사 능력에 의존하지는 말자고. 그나저나…… 별 수 없이 흩어져야 할 것 같은데. 진우 넌 저쪽부터 출발해. 난 이쪽으로 갈 테니. 은 형사는 나랑 같이 가는 걸로 하지."

"굳이 그러실 필요 있겠어요? 흩어지는 게 좀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안 봤다면 모를까, 아까 그런 모습을 보고도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 게다가 이 놈은 꽤나 위험한 축에 들어간다고."

"우리가 언제는 안 위험한 적 있었나요? 괜찮아요. 발견하면 숨어서 바로 신호 보낼게요."

"음…… 영 불안한데."

"에이, 괜찮습니다! 최 형사님, 저 은휘영이에요. 우리 팀 공식 엘리트."


자존심도 강하고 고집도 둘째 가라면 서럽다. 성별로 인해 따라오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려 무던히도 노력해오던 휘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팀 내에서도 늘 그녀의 고집에 못 이기는 척 져주곤 했었다. 지금은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본래 습관이란 무서운 법. 거의 등 떠밀리다시피 재한은 휘영과 다른 방향으로 출발해야 했다.


"발견하면 꼭 신호 보내. 절대로 무모하게 움직이지 말고. 알겠지?"

"걱정 마십셔!"


신신당부 끝에 비로소 한밤의 추적이 시작된다. 인적 드문 주택가. 한 명의 수배자와 세 명의 형사. 드문드문 설치된 몇 개의 가로등 덕분에 조명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사이사이에 나 있는 골목길 중에는 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도 제법 된다.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길은 아주 약간 경사가 져 있다. 앞만 보고 걸으면 평평한 길처럼 느껴지지만,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고저 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의 완만한 오르막길.


휘영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품 안의 총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어버린다.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발견할 때마다 걸음이 무거워진다.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는 호흡을 고른다.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 뒤 조심스럽게 안쪽을 들여다본다. 다행히 어둠 속에 아지랑이는 보이지 않는다. 휴우……


다시 또 걸음을 옮긴다. 한 발자국마다 온몸에 긴장감이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골목을 발견할 때마다 벽에 붙었다가 호흡을 고르고 셋을 센 뒤 들여다보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나씩 하나씩, 골목들을 지나칠 때마다 묘하게 익숙해지는 기분이 밀려왔다. 어느새 휘영은 기계적으로 골목들을 확인하며 오르막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뭐야……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이쪽이 아닌 건가?"


왔던 길을 다시 내려다본다. 언제 이만큼이나 올라왔나 싶을 만큼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위에서 바라보니 꽤나 고즈넉함이 느껴지는 길이다. 가로등의 불그스름한 빛을 받은 탓일까. 어둠 속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주택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참…… 근무 중에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이야. 참 느슨하구나, 은휘영.


다시 처음 가던 방향으로 돌아서니 평평한 길이 짧게 이어진다. 지금 서있는 곳 앞으로는 더 이상 가로등이 없다. 점점 어두워지는, 묘하게 나아가기가 꺼려지는 길. 그 끝에는 대문이 하나 보이고 그 사이에 또 골목일 듯한 짙은 어둠이 보인다. 꿀꺽. 잠시 잦아들었던 긴장감이 다시 밀려들었다. 괜찮아, 마지막이야.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하면 돼…… 스스로를 다독이며 휘영은 다시 벽 가까이 붙어 걸음을 옮긴다. 괜찮아, 마지막이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휴우……"


다행히 아무것도 없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돼 버린 걸까. 휘영은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까지 조용하네. 다른 쪽에서도 못 찾은 거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왔던 길을 되짚는다. 오르막 끝에 있는 가로등까지 가는 짤막한 길.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걸어가는 기분은 뭔가 짜릿하다. 조금 전 가로등 아래 서서 봤던 고즈넉함을 다시 바라볼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마저 든다. 정말 느슨해진 게 맞나 보다…… 혼자서 피식 웃으며 가로등 아래 섰다. 바로, 딱 그때.


"……!?"


고작 열 걸음 남짓한 거리. 핏빛의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사람의 실루엣이 서 있었다. 어떻게……? 분명 골목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올라오는 내내 수시로 뒤를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아니, 아니지.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실루엣이 다가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공포감이 왈칵, 치밀어 오른다.


"저, 저리 가…… 오…… 오지 마!"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는 다리가 휘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뒷걸음질 친다. 뭘 어떻게 해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경찰과 용의자? 아니, 이 순간 둘의 관계는 포식자와 피식자, 차라리 그 편에 가깝다. 핏빛 기운을 내뿜는 사내는 큼직한 보폭으로 느릿느릿 한 걸음씩 내딛는다. 휘영이 공포에 휩싸여 있다는 걸, 그 두려움 때문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가 넘친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방금 전 빠져나왔던, 그 어둠 속으로 계속 밀려난다. 털썩. 덜덜 떨리던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결국 풀려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휘영은 품 속에서 총을 꺼내 사내를 겨눴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움켜쥐어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총구. 상대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클클클,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쏠 테면 쏴보라는 듯, 여전히 느릿하면서도 분명한 걸음이 다가온다.


탕-! 타앙-!

공포탄이 먼저 터진다. 바로 이어서 실탄 한 발이 불을 뿜는다. 총기 사용 수칙, 사격 가능 범위는 상반신 아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 엄습해오는 이 죽을 듯한 공포. 그 속에서 자신을 꺼내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유일한 무기.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떨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맞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계속되는 공포에 스르륵, 손에서마저 힘이 빠져나간다. 달칵. 총이 바닥에 떨어진다. 주워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떨리는 다리로 바닥을 밀어내며 계속 도망친다.


"도, 도와줘요. 최 형사님. 오 형사…… 누가…… 나 좀 살려줘요……"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어느덧 마지막으로 살펴봤던 골목, 그 어둠 속까지 밀려난다.






"뭐야…… 허탕인가. 다른 쪽에서 잡았으면 좋겠는데."


재한은 골목골목을 샅샅이 살피며 걸었다. 하지만 인기척은커녕 누군가 지나간 흔적도 찾기 힘들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무협지에 나오는 보법이라도 익힌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든다. 혹시라도 놓친 건 없는지, 다시 한번 꼼꼼하게 점검하며 재한은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었다.


탕-! 타앙-!

적막으로 가득한 주택가에 총성이 울려 퍼진 건 그가 중간쯤 돌아왔을 때였다. 덜컥, 반사적으로 가슴에서 뭔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황상 100% 휘영일 것이다. 달린다. 처음 길을 나눴던 지점에서 재한은 진우와 마주쳤다. 그 역시 총성을 듣고 바삐 달려 내려오던 모양새.


"진우야!"

"최 형사님, 이쪽인가요?"

"그래, 네가 발이 좀 더 빠르니까 앞장서라. 무조건 달려! 이후의 모든 상황은 내가 책임진다."

"옙!"






반쯤 벌어진 입은 차마 다물 수가 없고, 턱이 부들부들 떨린다. 커질 대로 커진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의 공포. 상대를 마주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계속 뒤로 밀어낼 뿐이다. 핏빛의 아지랑이가 눈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해 상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야……"

"……!?"


잘못 들은 걸까? 탁한 쇳소리가 섞여있긴 했지만, 분명한 인간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온다. 지금까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는데. 이건 뭐지……? 휘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본다. 온몸을 옥죄던 공포가 아주 약간 잦아드는 걸 느꼈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잠시라도 놈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콱-!

하지만 이내 우악스러운 손길이 뻗쳐와 휘영의 머리를 내리누른다. 바라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압적 의사표현. 그 바람에 잠시 잦아드는 듯했던 극한의 두려움이 다시금 몸의 지배권을 앗아간다.


"꽤 오래 찾아다녔다고. 정말 꼭꼭 숨어있었다고 해야 하나…… 뭐, 이제라도 만났으니 상관없지만 말이야."

"……무……무슨 말이야, 그게."

"모르는 게 더 나을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휘영은 뒷목 언저리에 얼음을 갖다 댄 듯한 차가운 촉감을 느낀다. 머리를 찍어 누른 손 외에 다른 한 손이 목 아래쪽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선을 찬찬히 훑는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존재감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공포. 그 위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미지(未知)에의 두려움이 더해져 자아를 한층 더 압박해온다.


굴복, 체념, 무력감…… 무슨 짓을 당하든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극한의 절망감. 희미하게 어떤 장면 하나가 뇌리에 떠오르는 듯했지만, 너무도 흐릿해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다. 단지 지금 이 상황과 무척 비슷한 구도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지금 이대로 돌아가더라도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라고. 내가 네 몫까지 잘 살아줄 테니까 말이야."

"……"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 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https://brunch.co.kr/magazine/24jh-nove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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