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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7.

by 이글로

사내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 지껄인다. 여기서 날 죽이려는 건가? 그래…… 다른 것보단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휘영은 마지막 희망의 끈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느낀다. 상할 대로 상해버린 자존심. 이 이상 비참한 꼴을 보이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를 파고든다.


"아, 하긴…… 여기서 다 먹어 치워 버리면 돌아갈 것도 남지 않으려나.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먹어 치우긴 뭘 먹어 치워. 이 변태 새끼야!"


퍽-! 털썩-!

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방의 타격이 가해지는 소리. 이어 익숙한 목소리와 멘트가 들려온다.


"당신을 연쇄살인 혐의 및 현직경찰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또, 당신이 진술한 모든 내용은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젠장, 기절했잖아? 기껏 외워서 말해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함께 휘영은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무지막지한 힘과 뒷목 언저리를 훑던 불쾌한 손길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 두려움과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보이는 진우와 재한의 모습. 익숙한 얼굴이라는 판단이 선 순간, 마지막까지 손 끝에 걸쳐 있던 희망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밤 하늘이 핑그르르 도는가 싶더니 의식이 아득해진다. 진짜…… 지독하게 창피한 꼴이구나…… 두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여긴…… 어디지? 주위를둘러봐도 도무지 분간이 안 될 만큼의 어둠. 다만 실내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감도는 아늑한 공기 덕분에 마음은 꽤 편하다. 어느 정도 지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렴풋하게 주변 풍경이 보인다. 그리 멀지 않은 곳, 큼직한 문 같은 것이 보인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살짝 열려있다.


휘영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지난번 꾸었던 악몽에서와 달리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왠지 앞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짤막한 복도를 따라 잠시 걸었나 싶더니 갑자기 사방이 밝아진다. 어둠에 적응해 확장됐던 동공이 기습적으로 밀려든 빛으로 인해 잠시 제 기능을 잃는다. 시야를 수습한 뒤 둘러보니, 둥근 벽을 따라 한가득 이미지와 영상 같은 것들이 떠다닌다. 뭐랄까…… 마치 수백 개의 CCTV 화면을 한데 모아놓은 돔형의 관제실 같은 느낌?

"어……? 이건……"


휘영은 이미지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한다. 정영태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의 모습. 지홍의 얼굴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보이는 장면들은 대부분 자신의 기억과 관련된 것들이다. 마치 장롱 속에서 발견한 오래된 앨범같은 느낌. 그녀 자신에게조차 희미해져 가는 옛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빛 바랜 아날로그 사진 대신 선명한 이미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가 고성능의 카메라로 다시 사진을 찍어온 것처럼.


이미지들은 시간 순서로 배열돼 있었다. 그것들을 거꾸로 훑으며 걷는다. 가슴 한구석에 사무친 할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눈가에 어려오는 물기를 훔쳐내며 이미지 속 할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시절까지 지나 어느 정도 걸었을 때, 휘영은 기억에 전혀 없는 일련의 장면들이 별 위화감 없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아하긴 했지만 딱히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이미지들을 살핀다. 분명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익숙하게 느껴지는, 데자뷰(Deja Vu)의 연속. 혹시 이게 전생(前生)이라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기억의 이미지들은 시간 순서 외에 다른 규칙은 없는 듯했다. 행복했던 기억과 슬펐던 기억이 한데 섞여있다. 거대한 돔형의 방을 한 바퀴 둘러봤다고 여길 때 즈음, 자그마한 또 다른 문 하나가 눈에 띈다. 가까이 가보니 다른 어딘가로 뻗은 복도가 보인다.


복도의 벽에도 이미지와 영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 곳을 향해 걷는다. 낯설지 않다고는 해도, 기억에 없는 장면들을 딱히 오랫동안 들여다보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스쳐가듯 눈길을 주며 지나쳐갈 뿐이다.


그리 길지는 않은 복도의 끝, 닫혀있는 문 하나가 보인다. 애초에 외길인지라 선택의 여지 같은 건 없다. 문을 향해 나아갈수록, 어두운 느낌의 이미지가 점점 많아지는 듯하다. 계속 걸었다. 연속된 필름처럼 이어지던 이미지의 행렬. 어느새 끝이 보인다. 문 바로 앞, 가장 마지막에 자리한 하나의 장면 앞에서 휘영은 걸음을 멈췄다.


비 오는 밤, 경찰 사이렌 불빛, 폐건물…… 무척이나 진부한 요소들로 가득한 그저 그런 장면.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이건만, 다른 것들에 비해 뭔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 속 개체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폐건물 3층의 창문. 가까이 다가서자 신기하게도 시점이 바뀌며 내부가 보인다.


"헉……"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과 함께 오한이 밀려온다. 주저앉아 있는 여자, 손을 뻗으며 다가서는 괴한…… 가장 최근의 기억. 공포에 잠식당한 채 무력하게 뒷걸음질치던 자신의 모습. 그것과 똑같은 구도의 장면이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 '두렵다'는 감정이다시금 떠오르며 온몸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나마 이전과는 달리 견딜만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때, 어떤 음성이 머릿속으로 전달돼 온다.


[이제…… 기억하세요?]

"……조금은요."

[그거면 됐어요, 지금은. 이제 문을 열고 나가시면 됩니다.]

"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질문에, 무슨 의미인지도 모를 답을 입 밖으로내뱉는다. 그냥 상대방이 그 대답을 원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랄까.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짤막한 두 번의 문답이 오간 후, 휘영은 닫혀있던 문 앞에 섰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문을 확 열어젖힌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확연히다른 밝은 빛 속으로 걸어나간다.






"제가 때린 걸 기억 못한다고요? 너무 세게 맞았나, 그 놈?"

"그냥 상황 전체를 아예 기억 못하더라니까. 그 동네로 도망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난다는 거야. 꾀 부리는 건가 싶어서 전문가랑 면담도 시켜봤는데 거짓말은 아닌 것 같더라고."

"거 참, 요즘 이상한 일들이 참 많이 생기네요."

"어떻게 보면 다행이지. 내가 책임진다고 패기 있게 외쳐놓긴 했는데, 네가 한 방에 골로 보내버렸잖냐. 나 솔직히 좀 쫄았다. 깨어나서 과잉대응이네 뭐네, 이딴 소리 하면 피곤해지거든."

"확실히 그런 점에서는 다행이네요. 솔직히 저도 좀 겁나긴 했거든요. 한 방에 쓰러져버리기에 혹시 죽었나 싶어서."


최재한 형사와 오진우 형사는 그 날 밤의 사건에 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병실로 들어섰다.


"그나저나 은 형사는 언제쯤 깨어나…… 어라?"

"병실 잘못 찾은 거 아니죠? 이분 어딜 가신 거지?"


두 사람은 텅 비어있는 침대를 보고 적잖은 당혹감을 느낀다. 오늘 아침에 잠깐 들렀을 때만 해도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휘영이다. 그날 밤 급히 병원으로 데려온 뒤로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 정신적 충격이 꽤 컸던 탓에 의식을 못 찾고 있는 듯하다는 의사 소견도 들었다. 그런데 대체 어딜 간 거야? 누가 빼돌렸나?


"휘영이는 여전히 그 모양…… 어라? 니들 거기서 뭐하니?"


잠시 후 병실로 들어오던 정영태 팀장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재한과 진우를 발견한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텅 비어있는 침대가 보인다. 몇 종류씩 걸어놓았던 링거도 이동식 스탠드로 야무지게 옮겨서 끌고 나간 듯하다.


"뭐야, 언제 깨어나서 어딜 간 거야? 니들 봤어?"

"모르겠습니다. 저희도 조금 전에 왔는데 이미 도주하고 없던데요."

"이 말괄량이 덕분에 하루하루가 버라이어티하구나. 아이고, 머리야."

"어? 오셨어요?"


영태가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쉴 때 뒤에서 휘영이 들어온다. 한 팔에는 이동식 링거 스탠드에 연결된 줄이 주렁주렁, 다른 한 손에는 슈크림 빵이 들려 있었다.


"……지금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설명해주실까? 은휘영 경위님."

"아…… 아까 전에 눈을 딱 떴는데 엄청 배가 고프더라구요. 물어봤더니 밥 시간은 이미 지났다고 해서. 편의점 같은 거라도 찾아보려고 내려갔죠. 다같이 오실 줄 알았으면 뭐 좀 사다 달라고 할 걸 그랬네."


빵을 우물거리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휘영을 보며 세 사람은 고개를 휘휘 내젓는다. 원래부터 넘치는 활기에 어디로 튀어도 이상하지 않은 타입이긴 했다. 게다가 최근 보여줬던 몇 가지 사건을 생각하면 더더욱.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이틀 전 밤, 완전히 엉망이 됐던 모습은 무슨 꿈이라도 꿨던 건가 싶다.


"너 혹시 다중인격이라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아녜요. 최근에 좀 오락가락하긴했어도 기억은 다 나거든요? 추한 모습을 좀 보여드리긴 했는데, 그건 저를 위해서든 팀을 위해서든 빨리 지워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어쨌든 일단 좀 누워 있어라. 바로 어제까지 죽은 듯이 미동도 않던 애가 하루 아침에 이렇게 막 돌아다니는걸 보니 내가 지금 굉장히 불안하거든."

"저 완전 괜찮은데요? 아픈데도 없고 팔팔해요."

"내 멘탈이 완전 안 괜찮으니까 그냥 좀 누워주시지."

"네에~"






의식이 돌아온 뒤의 휘영에게 있어 병원생활은 고역 그 자체였다. 기본적으로 활동적인 데다가 어지간히 아프지 않고서야 병원을 찾지 않는 타입.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한 지금, 이 낯선 공간의 모든 것이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팀장님, 서에 들어가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되게 오래 계시는 거 같은데."


침대 위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화창한 바깥날씨를 감상하던 휘영은 무료함에 좀이 쑤셔오자 괜스레 주위 일에 참견하고 싶어진다. 재한과 진우는 잠깐 있다가 돌아갔고, 병실에는 영태만 남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의자에 앉아 신발까지 벗어놓고 침대 한 켠에 두 다리를 떡 하니 올린 채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영태의 모습.


"나 여기 온지 겨우 1시간쯤 됐거든? 성가시니까 좀 가라 이거냐? 대체 니들은 왜 나 쉬는 꼴을 못 보니."

"아니 그런 말씀이 아니고요. 어쨌거나 저도 여잔데 너무 맘 편하게 계시는 거 같다고나 할까."

"얼씨구. 현장 뛰면서 못 볼 꼴 봐온 게 벌써 몇 년인데 새삼스럽게…… 왜? 화장실가고 싶은데 소리라든가 뭐 그런 것 때문에 눈치 보이냐? 그런 거라면 부담 없이 이야기하렴. 얼마든지 비켜줄 테니."

"이익…… 무,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어쭈? 그 베개 뭐야. 설마 나한테 던지려던 건 아니지? 에이, 설마. 아닐 거야."


휘영은 무심결에 베개를 집어 들고 머리높이까지 올렸던 팔을 내렸다. 괜스레 멋쩍어져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팔에 연결해놓은 링거들을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완전 멀쩡한 것 같은데 무슨 주사를 이리 주렁주렁 달아놓은 거지?


"근데요, 팀장님. 저 무슨 명목으로 입원하고 있는 거죠?"

"아, 그거? 뭐 일단은 의식불명으로 들어오긴 했지."

"그럼 정신 차렸으니까 퇴원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근데 이 참에 좀 제대로 쉬라고 그냥 아무거나 갖다 붙여서 더 입원시켜 달라고 했어. 너 그 동안 이래저래 못 쉬었잖냐. 맞고 있는 링거도 다 영양제 비슷한 뭐 그런 것들일걸, 아마?"

"으익…… 그래도 되는거에요?"

"안 될 건 뭐야? 형사도 사람인데 완급조절은 하면서 일해야지. 병실이야 모자라면 모를까 펑펑 남아돌고, 이번 것까지 포함해서 최근 니들이 몇 건 올려준 덕분에 팀 전체에 한동안 실적 압박도 없을 테고. 입원비야 무슨 명목으로든 요청하면 얼마라도 나올 테니 거기에 좀 보태면 얼추 부족하진 않을 거 같고. 무엇보다도…… 여기다라도 잡아놔야 네가 어디 딴 데로 못 샐 거 아니냐? 쉬라는데 말 안 듣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그거 수습하느라 내가 너무 힘들어서 말이다."

"뭔가 감금당한 기분이네요."

"이런 말이 있지. 포기하면 편하다고."


감금당한 기분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퇴원하려 마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곳도 없으니 보호자 동의 같은 것이 없어도 퇴원수속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휘영은 고개를 내저어 떨쳐버린다. 당분간 여유 있을 테니 완급 조절 좀 하자는 영태의 말도 일리가 있었고, 동료들이 베풀어준 배려를 외면하는 것도 경우가 아닐 테니까.


휘영은 최대 높이까지 세웠던 침대를 살짝 내려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편안하게 기대고 누운 채 병실 천장과 바깥을 번갈아 바라본다. 청명한 하늘……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저…… 팀장님.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인데요."

"음?"

"팀장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요. 인간처럼 생겼는데 실은 인간이 아닌 뭐,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영태는 잠시 멈칫한다.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냐는 듯 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내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는 자기 이마를, 다른 한 손으로는 휘영의 이마를 짚어본다.


"……안 아프다더니 어디 안 좋구나? 머리 아프냐? 딱히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간호사 불러줄까?"

"칫, 저 완전 멀쩡하거든요?"

"얼씨구. 아까는 베개 던지려 그러더니 이젠 신경질도 부리네."

"오래 고민하다가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건데 이상한 취급이나 하고 말야……"


휘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영태의 손을 밀쳐내고 창문 쪽으로 돌아눕는다. 어쭈, 삐진 척도 할 줄 알고. 이제 보니 제법 깜찍한 면도 있네? 휘영을 데리고 꽤 많은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동안 딱히 해본 적 없던 생각. 영태는 피식 웃음이 난다.


"그게 무슨 상관일까 싶다."

"……네?"

"어차피 인간처럼 생겼다며? 그럼 그냥 인간이라 생각하고 지내면 되는 거 아냐?"

"겉은 인간이어도 속은 어떨지 모르잖아요?"

"그거야 같이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문제 아니냐. 인간 속도 모르는 마당에 인간 아닌 애들 속 좀 모르는 게 뭐 대수냐. 그게 그거지. 그냥 좀 특이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난."


별 걸 다 고민한다는 투의 대답이지만, 그렇다고 '내 일 아니니 모르겠다'는 식의 건성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마 진심일 것이다. 휘영은 빙긋 미소를 머금는다. 하긴, 본래 형사란 인간이라는 존재의 추악한 단면을 수도 없이 보고 살아야 하는 직업. 이십 년 남짓 경찰에 몸담으며 거의 대부분을 형사로 살아온 영태에게 인간이냐 인간이 아니냐는 별 의미 없는 주제일지도 모른다.


"이번엔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음? 뭔데요?"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 너 자신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


잠시 고민한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사실 '전혀 아니다'라고 부정하기는 어렵다. 무의식 속에서 기억 속 장면들을 훑어보고 온 뒤로, 휘영은 자신에게 뭔가 큰 변화가 생겼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언젠가 거울을 보며 느꼈던 것처럼, 지금껏 알아오던 자신이 낯설어지는 기분.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자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인데도 너무 태연하게 납득해버린 것이다.


언젠가 지홍이 설명했던 것은 물론,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도 상당수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난 대체 무엇이 돼 버린 걸까? 나를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난 인간이 맞긴 한 걸까?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의식을 찾은 순간부터 끊임 없이 그런 생각들에 시달려왔다.


평소와 다름 없이 영태와 말을 섞는 동안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면 다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하늘은 언제나 같은 하늘이었건만, 이제는 너무 색다르게 느껴진다. 이 복잡한 심정을 과연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한들 어디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긴 고민 끝에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영태에게 질문을 던지고 만 것이다.


"지금 대답하기 어려우면 안 해도 상관 없다."


이런 질문에 침묵이라는 건 긍정의 의미겠지…… 영태는 휘영의 심란한 마음을 알아채고, 굳이 답을 재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 너무 오래 있었네. 휘영이 화장실 가고 싶겠다. 난 이만 가볼 테니 화장실 마음껏 가려무나."

"팀장님!"


뭔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영태는 농담을 던지며 겉옷을 챙겨 일어섰다. 병실을 나서려다 말고 그는 다시 입을 연다.


"지금 너랑 나, 되게 진부한 상황에 놓인 것 같지 않냐? 드라마나 영화 같은 곳에 등장할 법한."

"음,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기왕 뻔한 장면이니까 대사도 뻔한 게 어울리겠지?"

"네?"

"인간이어도 상관 없고, 귀신이나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여도 솔직히 난 상관 없다. 그냥 너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언제까지라도 한 팀으로 같이 갔으면 좋겠다. 너만 괜찮다면 말이지."

"풉, 뭐에요 그게. 진짜 뻔한 대사네요."

"크흠, 흠. 간다. 쉬어라."


멋쩍은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영태는 잽싸게 병실을 나선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휘영은 다시 침대에 쭉 뻗고 눕는다. 아주 조금,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https://brunch.co.kr/magazine/24jh-nove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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