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양주병과 각종 안주 접시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테이블 위, 바닥 할 것 없이 곳곳에 술과 음식이 범벅이 돼 무척 지저분하다. 엎질러진 고급 술에서 피어 오르는 알싸한 향기가 방 안 가득 맴돈다.
한 사내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을 한 채 자리에 편안히 기대 앉아 있다. 양팔에 여자 한 명씩을 끼고 있고, 그 주위로는 거의 발가벗다시피 한 여자들 몇 명이 역시 술에 잔뜩 취한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똑똑-
숨소리 외에는 정적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노크 소리가 더해진다. 사내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뭐야, 귀찮게? 들어와."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사내 한 명이 조심스레 들어온다. 거의 올백으로 넘기다시피 한 머리. 옅은 체크무늬의 투피스 정장. 색깔은…… 브라운? 아니, 비슷하긴하지만 언뜻 보면 반짝이지 않는 금색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들어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앉아 있던 사내는 클클 웃음을 흘린다.
"무슨 일이야? 놀 때는 가급적이면 찾지 말라고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만큼 급하고 중요한 건이니까요."
"물론 그래야지. 안 그러면 굳이 목숨 걸어가며 날 방해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말해봐."
"어젯밤 주시 대상 1호가 다시 포착됐습니다. 앞으로 한 번 정도만 더 추적에 성공하면 완벽히 잡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게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닐 테고. 또 다른 내용이 있군?"
"이번 포착에서 특이사항을 하나 더 발견했습니다. 아무런 규칙 없이 움직이는 걸로만 간주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행동패턴을 종합해본 결과 특정 대상에 대해 상당한 집착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흠, 한 번만 더 추적하면 된다라…… 그 집착한다는 대상, 이용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안 해본 상황에서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죠."
"크크크크, 난 자네 그런 자세가 참 마음에 들어. 모든 권한을 위임할 테니 좋을 대로 진행하고 주요 경과만 보고해. 최대한 서두르는 것 잊지 말고. 골치 아픈 놈은 빨리 처리하는 게 서로 이득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나가봐."
문이 닫히자 사내는 양쪽의 여자들을 둘러본다. 무슨 이야기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21년산짜리 양주병을 들어 그대로한 모금 가득 마신다. 도수 높은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짜릿함에 사내의 표정이 확 일그러진다.
"이번엔 확실히 해결할 수 있으려나……잘하면 재미도 좀 있을 것 같고."
"사장님, 무슨 이야기인데요?"
"아가야, 세상엔 몰라야 더 좋은 이야기들도 있는 법이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그…… 그렇죠."
얼굴은 웃고 있지만, 어깨에 올려진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간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챈 여자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사내의 잔에 술을 따랐다.
기왕 쉬는 김에 제대로 쉬어버리자고 마음 먹긴 했지만, 삼시세끼 꼬박꼬박 나오는 병원밥을 먹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몸으로 뛰던 일을 주로 하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모 만화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동료들은 휘영이 멀쩡하게 깨어난 걸 확인한 후로는 뜸해졌다. 오진우 형사만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출석을 찍고 갈 뿐이다. 혼자 와서는 창가에 별말 없이 앉아있거나 괜스레 서성이다가 가곤 하는 걸로 봐서 정영태 팀장의 지시인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찾아올 만한 이웃도 거의 없다. 여전히 자주 왕래하는 집이 몇 있긴 했지만, 그다지 큰 일도 아닌데 일일이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시간은 무진장 많고, 할 일은 무던히도 없는 상황. 가만히 앉아 TV를 보는 건 휘영의 성격과 체질, 모두에 맞지 않는다. 일단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습관적으로 바깥에 나가 산책로를 거닐곤 했다.
병원 건물 앞, 벤치에 앉아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요즘 들어 부쩍 하늘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할까. 시시각각 흘러가는 구름이라든가, 노을이 서서히 물드는 장면도 제법 장관이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동틀녘의 하늘도 분명 멋질 것이다.
근원계라 불리는 미지의 장소, 저 너머의 하늘 어딘가에 그 세계가 존재한다고? 아직 방법은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그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거라고? 뭐, 굳이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더라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으로 얼룩덜룩해진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어느새 휘영은 잠시라도 시간이 나면 자동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 슬슬 춥네. 병실 창가에 앉아서 봐야겠다."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한기를 느낀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싶어 얼른 건물 안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온장고에서 따뜻한 꿀물 한 병 사 들고는 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응?"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자신의 병실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뒷모습은 물론 체형이나 대략적인 분위기까지 낯선, 전혀 모르는 남자. 이 시간에 누가, 무슨 일로?
"여긴 제 병실인데…… 누구시죠?"
"아, 은휘영 경위님 되시죠?"
'또 날 알아……? 에휴.'
자신은 모르는데 상대방은 자신을 안다. 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유명해진 걸까? 휘영은 슬그머니 이상한 기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그에게서 낯설지 않은 기운이 풍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가만, 이거…… 붉은 아지랑이……? 무척이나 희미했지만, 눈매를 좁히고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 같은 종류의 것이 맞는 듯하다.
"아, 갑작스럽게 찾아와놓고 소개가 늦었군요. 신현우라고 합니다. 이쪽에서 일하고 있죠."
의심과 불쾌함이 가득한 휘영의 표정에도 남자는 넉살 좋게 웃으며 명함 한 장을 건넨다. 마이웨이(My Way)? 처음 보는 상호다. 회사 이름치고는 뭔가 오글거린다는 생각을 잠깐 한다. 경찰 도움을 받을 일이 있는 걸까? 아니지…… 그렇다면 전화 신고를 하거나 경찰서로 찾아가는 게 맞다. 개인적인 용무? 흠…… 그거라면 가능성이 확 높아지는 일이 있지. 딱 하나.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대접할 게 이것뿐이네요. 오래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서 특별히 뭘 갖다 놓지 않았거든요."
휘영은 냉장고에서 팀원들이 가져다 준 주스 한 병을 꺼내 건넸다. 신현우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는다.
"별말씀을요. 늦은 시간에 쉬셔야 할 텐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간단하게 용건만 말씀 드리고 얼른 일어나겠습니다."
처음 품었던 본능적인 불쾌함과 달리 제법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쑥 떠오르는 누구와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 잔뜩 곤두섰던 경계심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다.
"저도 나름대로 알아보고 온 게 있으니 빙빙 돌리지 않겠습니다. 완전히…… 깨어나신 건가요?"
빙고. 역시 예상대로다. 간단한 질문이지만 일단 한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 공유되는 어떤 데이터베이스(Database)나 인트라넷 같은 일종의 통신망(Network)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어찌됐건 그것이 모든 사항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렇다면 특정 주기로 그 데이터를 보완할 수단이 필요할 것이고…… 어쩌면 오늘 찾아온 이 사람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잠깐 사이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며 적당한 대답을 찾는다.
"글쎄요. 무엇을 기준으로 그걸 판단하는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서…… 그래도 어지간한 건 다 기억이 나네요. 다만 아직 얼마 안 된 일이라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죠.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내용을 알아버리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하긴, 깨어나신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니 그건 별로 상관 없겠죠. 그럼 다른 걸 여쭙겠습니다. 이번에 체포한 범인은 만나보셨나요? 궁금한게 많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대체 어디까지를 알고 어디까지를 모르는 거야? 무슨 감시카메라 같은 거라도 달아놓은 건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알고 있고, 그게 아닌 건 모르는 거? 이젠 새삼스레 불쾌하지도 않다. 그냥 순수하게 의문이 들 뿐.
"그 날 이후로 계속 병원에만 있었어요. 제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움에 떨었는지를 기억해내고 나니 구태여 만날 필요가 없겠다 싶더군요."
"음…… 그럼 좀 민감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 날 놈과 마주쳤을 때, 경위님에게 뭔가 다른 말을 하지는 않던가요?"
"……"
어라? 뭐지, 이건? 떠 보는 건가? 휘영은 슬그머니 현우의 눈치를 살핀다. 또렷하게는 아니지만, 그날 밤 놈이 자신에게 건넸던 알 수 없는이야기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지홍을 만나게 되면 혹시 아는지 물어볼까 싶던 참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이에게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강력범죄 수배자가 제게 무슨 다른 할 말이 있겠어요? 왜, 그 놈이 저한테 뭐 할 말이 있다고 하던가요?"
"하하, 그거야 저는 모르는 일이죠."
"그런가요? 말씀 드렸다시피 전 그 날 이후로 서에 간 적이 없어서요. 제가 여기 있는 사이에 혹시 그 놈을 만나 뭔가를 들으신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죠. 오히려 궁금해지는데요?"
눈치싸움. 그간의 경험으로 심리전에도 잔뼈가 꽤 굵어진 휘영이지만, 신현우라는 이 남자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무언가 의미 있는 정보를 알아내고는 싶지만,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명함에 적힌 건 당연히 연막용일 것이고, 설령 진짜라 하더라도 뭘 하는 곳인지 드러난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 없는 문답을 하고 말았군요. 이거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네요. 송구스럽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꽤 흥미를 느끼고 있는 중이니까."
"다행이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아는 게 없는 듯하니, 이제 다른 주제를 이야기해볼까요? 이번에는 좀 흥미로우실 겁니다."
"……?"
신현우는 등받이에 바르게 기대있던 자세를 고쳐 상체를 약간 앞으로 가져온다. 한없이 예의 바르던 모습이 조금 공격적으로 변한 듯한 느낌이다. 여전히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올 듯한 기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얼마 전에 있었던 도심 폭발…… 보통의 사고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실 테고, 진범이 누군지 쫓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네, 그런데요?"
"엊그제 체포하신그 놈…… 아니 정확히는 그 놈이었던 존재도 그 사건과 연관돼 있습니다."
"……"
폭발사고에 관한 수사 자료, 지홍과의 만남과 그에게서 들은 설명, 갑작스레 깨달은 기억 속에서는 찾을 수 없던 이야기들, 이 자가 말하는 '그 놈'과 '그 놈이었던 존재'의 차이는? 지홍이 설명했던 자아이식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잠깐 사이에 수많은 단상들이 일제히 밀려 들어온다. 이 자의 진짜 정체가 뭔지는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됐다. 그건 나중에라도 알아내면 될 일. 그렇다면 이 시점에 가장 유의미한 질문은 뭐지? 머리가 아프다. 생각해내라고 스스로를 닦달해봐도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제가 뭘 어떻게 하길 원하시죠?"
"아…… 이거 너무 간추려서 이야기를 풀다 보니 저조차도 흐름을 종잡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어떻게 핵심을 잘 짚으신 듯합니다."
"……"
"지금 저희가 주시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놈을 최우선적으로 체포해주시면 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범법자라면 굳이 따로 부탁하지 않으셔도 잡는 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만."
"음…… 그걸 알려드리기 전에 반드시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야겠는데요. 저도 위에서 지시 받은 대로 일을 하는 처지라서……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까…… 범죄자 잡는 일을 놓고 저랑 거래를 하자는 건가요? 상당히 불쾌해지는데요."
"보통의 경찰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입원 중에 폐가 되는걸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겠죠. 분명히 못박아두지만, 경찰에서는 은 형사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거래라는 표현은 별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대체 뭘 약속해 드리면 되는데요?"
"말씀 드렸다시피, 대상에 관한 프로필을 건네드릴 테니 놈을 최우선으로 체포하겠다는 것에 동의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합니다. …… 체포 과정에서 실수를 가장해 놈을 죽여주세요."
"미친놈."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욕설이 튀어나온다. 휘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현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여전히 웃는 표정이다. 그 미소에서 더 이상 호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혐오스럽다는 감정이 묻어날 뿐. 저렇게 웃는 표정으로 사람을 죽여달라고 하다니, 흡사 사이코패스(Psychopath) 범죄자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경찰한테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사람을 죽여달라고? 너 이 새끼, 지금 제정신이니? 콩밥 한 번 무한리필로 처먹어볼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목소리 좀 낮춰주시죠.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닥치고 당장 여기서 꺼져. 살다살다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 정말."
그 여유만만한 태도에 분노는 더욱 타오른다. 이젠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팔짱을 끼고 컴컴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휘영아, 신경 쓰지 말자, 그냥 미친놈일 뿐이야…… 현우를 등진 채 마음을 가다듬는다.
'아무 말도 하지마. 한 마디만 더 하면 당신,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거라 장담 못해.'
"흠…… 그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가요? 그리고 폭발사고의 진범, 즉 당신의 원수라면?"
"입 닥치고 빨리 안 꺼…… 잠깐, 뭐라고?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휘영의 기대와는 달리 현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다음 말을 던진다. 마치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분노를 못 이겨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려던 휘영은 그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현우는 일어서서 천천히 다가온다. 병실 앞에서 봤을 때는 별로 주의 깊게 보지 않아 몰랐는데, 키가 꽤 크다. 그는 양 손으로 휘영의 어깨를 짚었다. 부르르 떨릴 정도로 엄청난 손아귀 힘이 전해진다. 호리호리한 체형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건 은 형사님이 맡아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근원계의 일이라는 뜻이 되겠죠. 사실 제가 직접 움직여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법이라는 선을 벗어나야 할 가능성이 커지거든요. 제가 모시는 분께서도 일이 시끄럽게 커지는 건 별로 원치 않으셔서 말입니다."
"……"
그래, 좀 더 들어보자. 듣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친 소리든 뭐든 그냥 나 혼자서만 참고 들은 다음 잊어버리면 되는 문제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다. 휘영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현우 역시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돌아온다. 호감으로 시작해 혐오로 바뀐 미소가 이제는 위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힘을 느꼈기 때문일까? 조금 전 느꼈던 희미한 붉은 기운이 다시 감도는 듯하다.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휘영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속삭인다.
"그 놈들은 어차피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질서를 파괴하고 좀먹는 존재일 뿐이죠. 근원계에서도 골칫덩이로 규정돼있을 정도입니다. 죽인다는 표현이 거슬리신다면, 다소 진부하긴 하지만 소멸시킨다는 말은 어떨까요? 그냥…… 순리대로 하자는 것 뿐입니다. 할머님의 원수도 갚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장담하건대, 은 형사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것만은 분명 약속드리죠."
"……"
할머니를 떠올리자 휘영은 망설임에 사로잡힌다. 답보 상태에 빠져 있던 수사. 그걸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제안. 미친 소리처럼 느껴지는 이 길을 따라가면 정말 할머니의 원수를 내 손으로 갚을 수 있는 걸까? 그것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아니, 그 전에…… 난 경찰인데 개인적인 원한에 사로잡혀 이 미친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어도 되는 걸까?
휘영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에 빠진 사이, 현우는 다시 몸을 바로 세운 뒤 옷을 툭툭 털었다.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가보겠다는 제스처.
"아무래도 오늘 제가 대화를 너무 서툴게 이끌어간 듯하군요. 반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저희 입장에서는 차선책도 마련이 돼 있으니까요. 결심이 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얼마 동안은요."
그 말을 남기고 현우는 뚜벅뚜벅 병실을 나선다. 그 뒷모습에는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지홍을 처음 만난 날, 명함 하나만 달랑 남기고 사라지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닫히는 문 틈으로 현우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뒷모습이 얼핏 보인 것 같았지만, 얼떨떨한 기분 때문에 그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뭐야……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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