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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저 너머의 하늘 #9.

by 이글로

병원 건물을 빠져나온 신현우는 곧장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뒤,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약간 취기가 도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어떻게 됐나?]

"확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계획에 이용할 수 있을 듯합니다."

[뭐, 자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거겠지. 집착의 이유가 뭔지는 알아냈고?]

"그건 본인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면요."

[그렇군. 제길, 그냥 찾기만 하면 나나 자네가 직접 없애버리는 게 빠르고 확실할 텐데. 번거로워.]

"백 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일전에 영을 가로채셨던 문제도 있고, 이 이상 트집 잡힐 거리를 늘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어. 그러니 참고 있잖아. 그리고 그건 가로챈 게 아니라 그쪽에서 허술하게 관리하는 바람에 나한테 흘러 들어온 거라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결과적으로는 시한폭탄을 가져오신 거니까요."

[그렇긴 하지. 생각난 김에 그 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좀 해봐야겠군. 더 이상 시간 끌어봐야 별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전에 말했듯이 이번 건은 온전히 자네가 알아서 추진하게나.]

"네."






대부분의 고민이라는 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다 보니 해결되지 않은 고민 위에 또 다른 고민이 겹치는 일은 무척 흔하다. 문제는, 아무리 많은 고민을 겪고 겪어도 면역되거나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다는 것. 게다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고민이 몇 개씩 겹쳐서 찾아온다면 어떨까?


사람에겐 살면서 중대한 선택의 기로라는 게 몇 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아무리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 해도 부족할지 모를 중요한 선택. 그런데 그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가 찾아온다면…… 어쩌면 미치지 않는 게 더 신기한 일일지도 모른다.


휘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뜻하지 않게 몇 차례의 큰 일을 연이어 겪은 뒤, 그녀의 정신은 딴 곳에 가있는 때가 훨씬 많았다.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도 갈팡질팡하는 시간들. 그나마 반 강제로 병원에 있느라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애초에 의도했던 '휴식'은 거의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신현우라는 사람이 다녀간 지 사흘 정도 지났을까. 휘영은 매일매일 머릿속을 채워가는 큼직한 고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중 언제나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현우가 남기고 간 '미친 소리'. 미소 띤 얼굴과 어깨를 짓누르던 힘을 생각하자 아침부터 입맛이 뚝 떨어진다. 결국 휘영은 식사를 거른 채 병원 밖으로 나와 산책로에서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그즈음, 지홍이 찾아왔다.


"어라? 나와 계셨네요?"

"어…… 어어…… 어?"

"……무슨 리액션이 그래요?"


언제가 됐건 찾아는 올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다.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큼직한 고민을 덜어줄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사람. 그런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와 주니 펄쩍 뛰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생각으로만.


"아…… 이 시간에 여기서 뵙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해서요."

"그건 그렇군요. 어제 경찰서 앞을 지나가는 길에 뵙고 갈까 싶어 들렀더니 병원에 계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날 밝자마자 오는 길인데 마침 여기서 마주치는군요. 아침 공기는 꽤 쌀쌀할 텐데…… 멀쩡히 돌아다니시는 걸 보니 크게 이상은 없으신가 봅니다?"

"분명히 좋은 뜻으로 하는 말 같은데 왜 멀쩡해서 아쉽다는 투로 들리지……"

"네?"

"아녜요. 일단 어디 가서 좀 앉죠. 병원 로비에 카페가 몇 군데 있는데 그쪽으로 가시겠어요?"

"뭔가 굉장히 환영해 주시는 느낌이군요. 이거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데요."

"그럴 땐 그냥 '기분이 좋다'고 표현하시는 게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지 않나요?"

"그렇군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옥신각신하며 두 사람은 산책로를 따라 병원 건물로 향한다.






"그동안 있었던 굵직한 일을 먼저 공유하는 편이 어떨까 합니다만."

"좋아요. 일단 제일 반가워하실 만한 걸 말씀드리자면…… 이제 저쪽 세계의 역사 설명 같은 건 그만해주셔도 된다는 거예요. 다 생각났거든요."

"오, 그거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요. 좀 늦은 감은 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타이밍입니다. 기초 교양에 할당할 시간이 충분치 않아서 고민하던 참이거든요."

"전 여기 갇혀 있으니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실제로는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요즘 뭘 하면서 지내세요?"

"마지막으로 만난 지는 일주일 정도 됐을 겁니다. 정말 심심하셨나 봅니다? 제 일을 다 물어보시다니. 저야 뭐 늘 그렇죠. 가게 일도 가게 일이고…… 그 공포를 느끼는 원인이 뭔지를 좀 알아보고 다녔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필요가 없어졌네요. 다 기억하셨을 테니."


현우에게는 숨기려 했던 화제지만, 이 사람에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방법이 없다는 투로 말한 것과 달리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모양이다. 그럴 거면 말이라도 곱게 해 주든지……


"네. 아직 좀 어렴풋하긴 한데…… 알게 됐네요. 이게 전부인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뭐… 차차 더 떠오르실 겁니다. 그보다, 무슨 사연인지 여쭤보면 실례일까요?"

"네, 실례인데요."

"……그럼 다음 기회에……"


너무 단호하게 잘라버리니 지홍도 살짝 당황한다. 하긴, 남의 아픈 곳을 덮어주지는 못할 망정 쿡쿡 찌르는 게 예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멋쩍음에 말을 얼버무리며 슬쩍 화제를 돌린다.


"이걸로 그 붉은 아지랑이가 보이게 된 것이 설명되는 셈이군요. 능력에 개연성이 생겼달까요."

"아, 그 능력? 이라고 하셨었나요? 아무튼 그거에 관해서 좀 묻고 싶은데요.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가질 수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안 그래도 마침 그걸 설명하려던 참이었는데 오늘따라 여러 가지로 타이밍 좋게 이야기를 이끌어 주시는군요."

"음? 무슨 말이에요, 그건?"

"지난번에 폭발 사건의 진범 이야기를 하면서 설명해 드렸던 걸 어느 정도는 기억하실 겁니다."

"아……"

"일단 놈은 폭발과 자아 이식,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 외에 다른 능력이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확인된 것만 가지고도 하나 이상의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근거가 되죠. 물론 그놈은 돌연변이라서 규칙에 어긋나는 존재라지만, 정상적인 케이스 중에서도 같은 사례가 있으니 근거로는 충분할 겁니다."

"그럼 혹시…… 얻을 수 있는 능력의 종류나 개수 같은 건 정해져 있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질문이 좀 이상하군요."

"어떤 부분이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문제니까요. 어떤 능력을 얻었는데 그게 원래 정해져 있었던 건지, 랜덤으로 얻게 된 건지 스스로 알 도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슨 게임 캐릭터처럼 스킬 목록 같은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네요. 하지만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음…… 뭐, 그럴듯하군요. 회복하신 기억에 어떤 내용까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쪽 동네에 넘사벽 같은 양반들이 꽤 많아서 말이죠. 아무튼 일단 저는 아닙니다.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한 인간이 하나 떠오르긴 합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네요. 무엇보다 제가 별로 만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요?"

"변태거든요."

"……"






불천은 한쪽 팔을 난간에 걸치고 한 손은 이마에 얹은 채 멀리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땅 곳곳에는 과일나무와 덤불, 각종 곡식과 약초 등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구역별로 나눠진 듯하면서도 자연스레 어우러진 생태공간. 높은 곳에서 바라봐야 겨우 끝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큰 규모다.


오래전 불천은 농작물이나 식물을 키우거나 관찰하는 소박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지금 그가 서있는 난간 바로 앞 자그마한 땅이 처음 시작했던 곳이다. 그러던 중 웬 여인이 난데없이 찾아와 몇 가지 조언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마치 자연 속 식물과도 같은 여인의 분위기에 흥미를 느껴 몇 차례 도와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전담 조언자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존대하며 따르는 녀석들도 엄청나게 생겼고.


그 이후로는 각종 서류에 파묻혀 지내느라 점점 작물들을 살필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졌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을 수십 차례 했었지만, 성격상 스스로 시작한 일을 도중에 내려놓기도 찜찜했다. 어쩔 수 없이 땅 가꾸는 일은 후임자를 하나 뽑아서 맡겨둔 채, 골치 아플 때 한 번씩 와서 바라보며 쉬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휘유~ 그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커졌구만.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아. 후임 녀석 하나는 정말 잘 뽑았다니까."

"불천님, 약속시간이 다 돼 갑니다."

"벌써? 제길, 이상하게 여기 와 있을 때만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은데……"

"엄격한 질서대로 흘러가는 곳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도 알아.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바쁘신 몸과 잡은 약속이니 늦을 순 없지. 가자."






"어서 오시게, 불천. 오랜만이구만."

"그렇군. 서로 어지간히 바쁘니 시간 내기가 참 힘들어."


노인, 해강현은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 가득 화색을 띄우며 불천을 맞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나이 차가 있어 보이지만, 불천은 자연스럽게 노인을 평대한다.


"무척 바쁜가 보군? 꽤 오랫동안 지나가다 마주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뭐, 바쁜 것도 있긴 한데…… 그 주름진 얼굴 보는 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라서 일부러 피해 다닌 것도 없진 않아. 그래서 말인데, 외모를 좀 바꿔볼 생각은 없나?"

"학자라면 모름지기 관록 넘치는 외관이 필요한 법이지. 나름의 철학이니 존중해 주시게."

"킁, 개똥 같은 철학이로구만. 그럼 주름이라도 좀 줄이게. 너무 많아."

"그건 고려해 보도록 하지."


불천은 콧방귀를 뀌며 해강현이 권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부름을 맡은 조수가 다가와 차 두 잔과 주전자를 내려놓고 물러간다.


"한 잔 들게. 별로 유쾌하지 않은 얼굴을 보러 여기까지 일부러 행차하신 이유는 뭔가?"

"왜긴. 요새 일을 너무 안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닦달 좀 하러 왔지."

"돌아가는 사정이 어떤지 뻔히 알 텐데 쓸데없는 트집이구만. 어설픈 갑질 하려 들지 말고 좋은 말로 진행상황 체크하러 왔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쯧쯧, 이거야 원…… 농사짓고 살 적의 성질머리가 백 번은 좋았지."

"피장파장이야. 자네야말로 이상한 책 붙잡고 앉아서 엉뚱한 실험이나 일삼던 시절이 훨씬 좋았네. 이제는 능글맞아가지고……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돌연변이 현상 분석과 기억 누적 프로젝트 진행, 어느 쪽을 묻는 겐가?"

"당연히 후자 쪽이지. 자네는 그쪽에 상시 투입이라는 거 다 알고 있네. 돌연변이 쪽은 인원이 많아서인지 보고서가 수시로 올라오더군."

"인원 배분까지 알고 있으면서 이쪽은 속도 내기가 어려운 상황인 건 왜 모르나? 얼마나 걸리고 자시고 간에, 경력이 부족한 녀석들 몇만 데리고 하느라 영 지지부진이라네."

"그럴 테지. 또 뭐 비공식적으로 성과를 거둔 게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자네 원래부터 그런 거 많잖아? 몰래 실험해 보고 감춰두는 거. 크흠, 흠."


불천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음을 재차 확인하자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그런 다음 목소리를 살짝 낮춰서 말을 이었다.


"성과가 안 나오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실패 사례가 나와서는 안 돼."

"당연하지. 그땐 나도 엄청난 충격이었으니 굳이 상기시키지 말았으면 좋겠군. 학자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거든.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는 케이스가 발생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네."

"그렇지…… 이곳의 법칙과 질서를 넘어선 가설 세우는 데는 제일인 자네 아닌가? 자네가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걸세."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게 말하는 재주를 익혔군. 난 그저 학문에서 고정된 울타리 안에 갇혀 있으면 발전이 없다고 믿을 뿐이라네. 질서를 어지르고픈 생각은 전혀 없으니 모함하지 말게나."

"사라져 버린 원인이나 이후의 과정 같은 건 계속 찾아보고 있는 건가?"

"당연한 말씀을. 밝혀내기만 하면 연구에 엄청난 도움이 될 텐데 손 놓고 있을 수 있겠나. 다만 워낙 민감한 문제다 보니 조심스럽게 알아보고 있어. 조수 녀석들도 모르게 혼자 해야 하는 일이니까. 봉인이나 여타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살펴봤는데 그건 아닌 듯하고…… 저쪽으로 넘어간 뒤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쪽이 유력하긴 한데, 그건 영을 회수해 기억을 살펴보지 않는 한 알아낼 도리가 없네. 가장 원초적으로는, 기억을 누적시킨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겠지."

"어허, 미래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야.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마. 다른 케이스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었잖아?"

"학문의 영역에서는 단 하나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배제해서는 안 된다네. 0%와 1%의 차이는 엄청나거든. 만약 전제조건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될 일 아닌가? 손 놓고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옛 제자 하나가 연락을 해와서는 기억 누적에 관해 몇 가지를 묻던데. 자네도 보고 받았나?"


불천은 차를 마시던 손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갸웃한다. 밤낮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보고를 받아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쉬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최근 프로젝트 대상자 중 하나라며 특이사항 보고가 수시로 올라오던 한 케이스가 떠오른다.


"옛 제자? 기억 누적에 관한 보고라면…… 아, 무슨 건인지 알 것 같아. 오류투성이 케이스가 하나 있는데 보고가 워낙 자주 들어와서 말이지. 정말 골치 썩게 하는 케이스야. 그 담당자가 자네 제자였구만?"

"어허, 오류라고 단정하지 말게나. 그런 편견 하나하나가 우리에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는가?"

"그게 싫으면 빨리 결과물을 가져다 달란 말이야. 당최 믿을 만한 데이터가 없으니 나한테는 오류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나."

"결국 또 원점으로 돌아가는구만. 이 친구야, 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물론 놀 때도 있긴 하지만…… 늘어지게 노는 건 아니니 좀 믿어주게."

"뭐, 그러시겠지."

"휴우…… 자네니까 말해주는 건데, 곧 몇 가지 주제에 대한 가설들이 취합될 거야. 사실 검증을 거치기 전에 내용을 유출하는 건 원칙에 어긋나는 거지만 자네가 워낙 독촉을 해대니……"

"역시 뭔가 있을 줄 알았어. 내가 독촉을 하건 말건 원칙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지. 그래, 어떤 건가? 한두 가지라도 좋으니 말해봐."


해강현은 잠시 머리를 긁적인다. 뭔가 낚인 기분. 두뇌파로서 무수한 경력을 쌓아왔지만, 늘 학문적으로만 접근해 왔기에 잔꾀에는 늘 취약하다. 물론 그가 정해놓은 규칙에 어긋나는 짓을 해온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의 선을 그어놓고 하는 일이다. 거의 대부분 불천의 요청으로 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껄끄러운 건 매한가지긴 하지만.


"휴…… 예나 지금이나 자네 페이스에 말려들면 빠져나올 수가 없다니까. 어쨌든 내가 말을 꺼냈으니 책임도 져야겠지. 두 가지 정도로 타협하세. 일단, 기억 누적 프로젝트에 참여할 대상 선발에 관한 이야기네. 이번에 옛 제자 녀석과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해 본 건데, 단순히 안정성이 높게 나타난 영들 중에서만 선발하는 건 위험하지 않나 싶어."

"오류…… 아니, 이상현상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영 안정성이 아니고?"

"그래. 자네나 나나 너무 많은 영들을 보고 다루다 보니 잠시 무디게 생각하는 부분이 하나 있어. 그들 하나하나가 각각의 개성과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

"어허, 이 친구가! 대순환 명부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존재가 그런 질문을 하다니? 이들은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란 말일세. 과학 실험에 쓰는 광물 같은 게 아니라고."

"그렇게까지 취급한 적은 없네. 왜 흥분을 하고 난리야. 개성과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이 프로젝트 대상 선발과 무슨 상관이 있냐는 걸세."

"말 그대로야. 개체마다 가지고 있는 세부적인 속성이 이상현상과 직결될 수도 있다는 거지. 이 부분은 꽤 복잡한 내용이니 나중에 문서로 만들어서 직접 찾아가도록 하겠네."

"안 그래도 벌써 머리가 아플 듯한 참인데 거 참 고마운 말이로군."

"그리고 두 번째로…… 문제의 그 실패 사례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실 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르네."

"엥? 무슨 소리야, 그건? 지금 근원계의 이목을 피해서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가? 아무리 가설이라지만 그건……"

"어허, 끝까지 듣고 이야기하게. 물론 대순환에서 벗어나 멀쩡할 수 있었던 사례는 아직까지 없었어. 내가 아무리 일말의 가능성도 의심해 보는 타입이라지만, 그건 그야말로 가장 뿌리에 위치한 규칙을 어기는 셈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을 경우의 수'라면 다르지. 자네도 익히 알고 있는 변수가 하나 있을 텐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의 수? 익히 알고 있는 변수? 그렇다면 퍼뜩 떠오르는 이가 하나 있다. 희대의 무법자, 성과만능주의자, 절대적이라 할 만큼 강하지만 한없이 이기적인 존재. 불천은 미간을 확 찌푸린다.


"……아…… 설마 그 정신 나간 놈……"

"정말 어지간히도 싫어하나 보군.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존재를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하다니…… 어쨌든 가능성은 충분하지. 그쪽에서 가로채놓고 존재감을 감춰버린다면? 그리고 시치미를 똑 뗀다면? 그건 좀 더 위쪽 분들의 문제가 되네. 이미 우리가 손댈 수 있는 선을 넘어서버리는 게지."

"하…… 젠장. 듣고 보니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군. 가설이 아니라 기정사실로 봐도 맞아떨어질 것 같아. 문제는 정말 그렇다고 해도…… 그놈을 칠 수 있는 합당한 근거가 될까? 그분은 어지간한 이유로는 움직이려 하시지 않을 텐데."

"그건 차차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지. 어쨌든, 오늘 나와 했던 이야기들은 그분 귀에 들어가지 않게 주의해 주시게나. 절대 심기 편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고."

"나한테 정보 흘려주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답답하긴 하지만 유익한 정보였네. 내 걱정은 붙들어 매고 자네 조수들 입단속이나 잘하라구."




<저 너머의 하늘>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려 하는 현대 판타지 소설입니다.

대략 이틀~사흘 간격으로 한 편씩 올리려 계획 중이지만, 큰 흐름만 짜놓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전개하면서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작업 스타일상 가끔씩 일정이 어긋날 위험도 있습니다.
(물론 가급적 준수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전체 연재작은 https://brunch.co.kr/magazine/24jh-nove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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